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부산대, 전주대 등 전국 20개 대학 공과대학 건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이름이 있다. 바로 ‘해동’이다. 서울대 해동관, 국민대 해동 크리에이터라이브러리(Kreator’s Library), 부산대 해동학술정보실…. 대학마다 이름이나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하루 수백 명의 학생이 공부하거나 토론하며 머무는 공간이다. 3차원(3D) 프린터 같은 첨단 장비를 갖춰 학생들이 창업 시제품을 만들어볼 수 있도록 한 곳도 있다. 이 공간들은 모두 해동과학문화재단의 기부로 탄생했다.
어느 90대 中企 회장의 못말리는 '이공계 대학 사랑'
이공계大 ‘든든한 후원자’

김정식 대덕전자 회장(90)이 1991년 설립한 이 재단은 30년 가까이 이공계 인재에 투자해왔다. 누적 금액으로 150억원에 달한다. 한 사립대 총장은 “김 회장은 살림살이가 팍팍한 대학들에 28년째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다”며 “그럼에도 기부 사실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늘 신신당부한다”고 전했다.

해동과학문화재단은 출범 1년 전인 1990년부터 매년 과학기술 분야 연구자에게 ‘해동상’도 시상하고 있다. 한국공학한림원, 한국통신학회, 한국마이크로전자 및 패키징학회 등 4개 학회를 대상으로 지금까지 총 282명의 연구자에게 1인당 2500만원의 연구비를 지원했다. 2010년부터는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대학생 280여 명에게 장학금 약 22억원을 후원했다. 출판사들이 잘 팔리지 않는 이공계 학술서 발간을 꺼리자 한국공학한림원과 함께 2001년부터 18억원 이상을 투자해 70권을 펴내기도 했다.

‘맞춤형 기부’도 마다하지 않는다. 김 회장은 김도연 포스텍 총장으로부터 “기숙사에서 학생회관 가는 길에 계단이 높아 휠체어를 탄 학생들이 불편을 겪는다”는 말을 들은 뒤 엘리베이터를 짓도록 기부했다. 이 엘리베이터는 휴게공간 등을 갖추고 ‘해동78타워’라는 이름으로 오는 4월 완공될 예정이다.

김 회장이 이처럼 대학 지원에 적극적인 이유는 열아홉 살 때 부친을 여의고 세 여동생을 보살피며 어렵게 대학을 졸업한 경험 때문이다. ‘해동’은 부친의 호다. 김 회장은 자신의 대학 시절을 “하루살이처럼 살았다”고 표현했다. 친구, 친척들이 십시일반 보태준 돈으로 학비를 내며 공부했다. 그는 “살림이 너무 어렵다 보니 서울대 통신과에 입학한 첫해에 아버지가 휴학하고 취업하라고 권하셨다”며 “그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유산이라곤 가난뿐이었다”고 말했다.

휴학 후 조선호텔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했던 김 회장은 “도중에 6·25전쟁이 나서 입대하지 않았으면 공부는 거기서 끝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학도병으로 입대해 공군통신장교로 복무한 덕에 서울대 통신과 교수, 선배들과 함께 ‘학교의 연장선상’처럼 군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부대에서 배운 지식이 창업으로 이어졌다. 김 회장은 “나도 어려움을 겪었기에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공부 갈증’을 잘 안다”며 “자랑할 것 없는 삶이지만 기업을 세워 50년 넘게 지켜온 것과 재단을 세워 이공계 인재들에게 도움을 준 것, 이 두 가지 덕에 더 이상 원이 없다”고 했다.

국내 전자산업의 산증인

1965년 대덕산업으로 시작한 대덕전자는 국내 전자산업의 역사를 그대로 밟아온 인쇄회로기판(PCB) 생산업체다. 라디오, 흑백·컬러TV에 들어가는 부품을 생산하다 현재는 스마트폰, 5G(5세대) 이동통신 등에 필요한 PCB를 만들어내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9600억원이었다. 김 회장의 아들인 김영재 대표는 2012년부터 삼성전자협력회사협의회(협성회) 회장을 맡고 있다.

대덕전자는 공장이 있는 경기 안산에서도 활발한 사회공헌활동을 하고 있다. 대덕복지재단을 세워 어린이집을 지은 뒤 안산시에 기부했다. 장애인들이 애써 직업훈련을 받아놓아도 일터가 없다는 현실을 듣고는 ‘해동일터’를 세웠다. 재봉 기술을 배운 장애인들에게 대덕전자 작업복 생산을 맡겼다. 김 대표는 “처음엔 단춧구멍도 잘 안 맞아서 직원들이 ‘작업복이 왜 이러냐’고 불평하기도 했다”며 “이제는 작업복 질이 좋다고 소문이 나서 협력회사들도 제작을 맡길 정도”라고 말했다.

외국인 근로자가 많은 안산에선 의료 서비스 부족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많다. 대덕복지재단은 2004년부터 매년 1억원가량을 안산빈센트의원에 후원하고 있다. 이 병원은 입구에 ‘우리 병원은 건강보험이 없는 사람들이 오는 곳입니다’라고 적어 두고 무료 진료를 한다. 취지에 공감하는 지역 의사, 간호사들이 재능기부로 근무한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