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 만에 휴원 결정한 국내 첫 산부인과 전문병원, 제일병원 진료 중단한다
국내 첫 산부인과 전문병원인 제일병원이 휴원한다. 진료·검사 등을 중단하고 입원 환자는 다른 병원으로 옮기도록 했다. 경영난을 극복하기 위해 시작한 매각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30일 의료계에 따르면 서울 중구 묵정동에 있는 제일병원은 지난 24일부터 외래환자 등에게 휴진 결정을 통보했다. 29일부터는 응급실만 축소 운영하고 있다. 이마저도 평일 야간과 토요일, 휴일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 병원 관계자는 "이사회 구성권을 매입하기로 한 투자자 측이 이달 중 긴급 투입하기로 한 200억원을 입금하지 않고 있다"며 "법원에 회생을 위한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일병원은 1963년 문을 연 국내 첫 산부인과 전문병원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 국내 신생아의 2%가 이곳에서 태어났을 정도로 국내에서 분만 진료를 가장 많이 했다.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 등 삼성가 3~4세가 대부분 이곳에서 태어났다. 영화배우 이영애, 고현정 씨 등도 이곳에서 출산했다.

제일병원 창업자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조카인 고(故) 이동희 이사장이다. 1996년 이 이사장이 폐암으로 별세한 뒤 삼성그룹이 경영했다. 2005년 삼성그룹 계열 병원에서 분리됐고 이름도 삼성제일병원에서 제일병원으로 바뀌었다. 이후 이 이사장의 장남인 이재곤 이사장이 병원 운영을 맡았다. 삼성그룹에서 독립한 뒤 제일병원은 오랜 기간 경영난에 시달렸다. 무리한 증축과 과도한 차입으로 재무상태가 악화됐기 때문이다. 노사 갈등도 경영 악화의 원인이 됐다.

지난해 견디기 힘든 상황에 처하자 병원 측은 이사회 구성권 매각을 통해 자금 마련에 나섰다. 국내 의료법인은 의료법에 따라 외부 투자를 받거나 인수합병(M&A)을 할 수 없어 병원 운영권(이사회 구성권)을 넘기는 방식으로 매각이 이뤄진다.

동국대 등이 협상에 나섰지만 부채가 많아 포기했다. 병원은 지난달부터 다른 투자자와 매각 논의를 했지만 이마저 여의치 않아 휴원을 결정했다. 파산과 폐원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도 나온다. 병원의 부채 규모가 커 회생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병원 노동조합 등에 따르면 제일병원 부채는 은행 빚 900억원을 포함해 1280억원 규모다. 수개월째 직원 월급도 못 주고 있다.

의료진도 이탈하고 있다. 부인암 명의로 알려진 김태진 산부인과 교수는 내년 1월부터 건국대병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한정열·이기헌·임경택 산부인과 교수 등 원로 교수들은 당분간 병원에 남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산부인과 교수는 "저출산 영향으로 신생아가 줄었어도 제일병원은 산모들이 가장 많이 찾던 병원"이라며 "이렇게 탄탄하던 병원이 위기에 빠진 것은 경영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산부인과 진료비로는 수익을 내기 어려워 대부분 병원이 신생아용품 등으로 사업 다각화를 할 때도 진료에만 집중하던 병원"이라며 "제일병원 사태를 계기로 건강보험 분만 수가 구조에 문제가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