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대 젊은 나이에 심한 건망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젊음(Young)과 알츠하이머(Alzheimer)를 조합한 영츠하이머라는 신조어가 생겨났을 정도다.
건망증은 뇌가 여러 일을 처리하다 과부하가 걸려 일시적으로 저장된 기억을 꺼내는 능력에 문제가 생긴 것을 말한다. 나이가 들면 머리카락이 빠지고 근육이 점점 약해지는 것처럼 노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20대에 심한 건망증을 겪고 있다면 생활습관 및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윤지애 을지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인터넷 검색창을 띄우자마자 자신이 뭘 검색하려 했는지 생각이 안 난다거나 메시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자신이 어떤 말을 하려 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것도 건망증의 일종”이라고 했다. 그는 “젊은 사람의 건망증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스마트폰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스마트폰은 인간의 뇌를 대신해 ‘기억’이라는 역할을 담당한다. 주변 사람의 연락처, 생일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필요한 작은 기억도 스마트폰에 메모한다. 아주 간단한 계산도 스마트폰으로 하는 사람이 많다.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디지털 기기에 의존하면 뇌는 활동이 둔해진다. 스마트폰 의존도가 높은 젊은 층은 이로 인해 건망증과 같은 증상이 심해질 수 있다.
윤 교수는 “스마트폰에 지나치게 의존해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스마트폰 사용 빈도를 의식적으로 줄여야 한다”며 “꼭 기억해야 할 사항이면 이를 입 밖으로 소리 내 말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고 했다.
우울증, 스트레스 때문에 건망증이 심해지기도 한다.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일상생활을 하는 데 집중력이 흐려지고 무기력감도 호소한다. 우울증이 있으면 일시적으로 주의 집중력과 기억력이 감소한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판단하는 사람의 뇌는 지속적으로 활성화된다. 우울증이 있으면 사고 흐름이 느려지고 단조로워진다.
술을 많이 마시는 것도 기억력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된다. 술을 마신 뒤 필름이 끊긴다고 표현하는 블랙아웃 현상은 지나친 음주 때문에 단기 기억상실을 경험하는 것이다. 과음하면 기억의 입력과 출력을 담당하는 해마가 마비된다. 이때 단기기억을 저장하는 기능이 떨어져 블랙아웃 현상이 생긴다. 대부분 짧은 시간에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면 나타난다. 대개 혈중알코올농도 0.15%일 때부터 기억력 장애가 시작되는데 심하면 술 마시는 동안 일어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기도 한다. 블랙아웃을 자주 경험해도 가볍게 생각하고 넘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블랙아웃을 자주 경험하면 나중에 건망증은 물론 치매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윤 교수는 “술을 마실 때 간 손상을 대개 걱정하지만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부위는 뇌”라며 “알코올은 뇌세포를 파괴하고 뇌와 신경계에 꼭 필요한 비타민 B1의 흡수를 방해한다”고 했다. 뇌를 망가뜨려 알코올성 치매 위험도 높인다. 음주량을 적절히 조절해야 한다.
평소 기억능력을 높이는 생활습관을 유지하는 것이 건망증 증상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뇌의 다양한 부분을 자극할 수 있도록 취미생활을 하고 규칙적으로 운동하면 기억 능력을 높이는 데 좋다. 전문 분야를 선택해 공부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신문, 뉴스 등을 보며 세상의 다양한 일에 관심을 두고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때는 청각, 시각 등 한 가지 감각에만 의존하지 않고 여러 감각을 써야 한다.
세브란스병원, 27일 간이식 건강강좌세브란스병원이 오는 27일 오후 1시부터 병원 종합관에서 간이식 후 건강관리를 주제로 무료 건강강좌를 연다. 이식외과 의료진과 이선영 이식외과 간호사, 김효진 약사, 이나래 영양사 등이 간이식 환자들이 일상으로 복귀하면서 신경 써야 하는 점에 대해 강의한다."프로바이오틱스 투여 후 腸 손상 줄어"권미나 서울아산병원 교수팀이 항암제를 투여하고 방사선을 쬔 생쥐에게 프로바이오틱스를 투여했더니 젖산이 증가해 장 손상이 줄었다고 발표했다. 암 환자가 항암 치료를 받으면 장 점막이 떨어져나가 설사 등을 호소한다. 이번 연구로 프로바이오틱스 치료법 개발 가능성이 열렸다.대사질환자, 전립선암 위험 높아하유신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비뇨기암센터 교수팀이 20세 이상 성인 남성 1087만9591명을 10년간 관찰한 결과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등 대사질환자는 전립선암 위험이 높아졌다. 50대 이하 남성은 이들 질환이 있으면 전립선암 위험이 1.43배 높았다.
김광수 농협금융 회장(61)은 평생 ‘고비’를 옆구리에 끼고 살았다고 했다. 학창시절은 물론이고 금융 관료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에도. “매 순간 고비가 찾아왔고 그때마다 온 힘을 다해 눈앞의 과제를 풀고자 애썼습니다.”지난 19일 서울 서대문 만석집에서 만난 김 회장은 “식당 이름처럼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났느냐”는 질문에 손을 내저었다. 그는 “만석과는 거리가 멀었다”며 “고향인 전남 보성엔 먹거리가 다양하긴 했지만 크게 풍족하진 않았다”고 했다.그가 만석집을 안 것은 농협금융 회장에 취임한 지난 4월이었다. “이곳에 올 때마다 시골 밥상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요. 시골 밥상은 언제 먹어도 속뿐 아니라 마음까지 든든하게 채워주죠.” 새콤달콤한 꼬막무침과 홍어삼합, 노릇하게 구워진 고등어, 고들빼기김치 등 남도에서 올라온 식재료로 조리한 음식이 한 상 가득 차려졌다. 곁들여 나온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가 식욕을 돋웠다.아버지는 농협 근무…어머니, 늘 배움 강조김 회장의 젓가락이 가장 먼저 향한 음식은 고들빼기김치였다. “고들빼기는 보성에서 가장 많이 나는 나물입니다. 입맛이 없을 때는 쌉쌀하면서도 알싸한 이 맛이 끝내줍니다.”“고들빼기처럼 농협과의 인연도 깊습니다. 아버지가 농협에 다니며 4형제를 키우셨거든요. 4형제 모두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라고 광주 작은아버지 댁으로 유학도 보내주셨어요.”4형제 중 장남이던 그는 가장 먼저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야 했다. 그는 이때를 인생의 첫 번째 고비로 꼽았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아홉 살 무렵이었다. 돌연 ‘더 큰 동네에서 열심히 공부해보라’는 어머니 말씀에 광주로 전학 갔다. “등을 떠밀렸죠. 토요일이 되니까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더라고요. 차비를 구해서 3시간가량 시외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 혼쭐이 나고 곧장 발걸음을 돌려 광주로 돌아갔죠.”삭힌 홍어회에 돼지고기 수육과 신김치를 얹어 먹는 홍어삼합은 만석집의 대표 메뉴로 꼽힌다. 김 회장은 여기에 막걸리를 곁들여보자며 잔을 들었다. 홍어회의 톡 쏘는 맛에 막걸리의 탄산감이 더해졌다. “이런 건 어릴 때 구경하기 힘들었습니다. 대학 마치고 돈 벌기 시작하면서 먹었지요.” 서울대에 입학한 첫해엔 학회에 들어가 책에 묻혀 살다시피했다. 1978년 대학 3학년이 되던 해 유신 반대 시위가 대학에서 본격 시작됐다. 김 회장은 “시위엔 참여하지 않았다”며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1980년 5·18 민주화운동의 여파로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져 9월 복학했을 땐 외환은행에서 직원을 뽑고 있었다. 홀린 듯 원서를 넣었고, 외환은행은 그의 첫 직장이 됐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에 가면서 그는 다른 결심을 했다. 김 회장은 “하고 싶은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1순위가 공무원, 2순위는 교수였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1982년 행정고시 1차 시험에서 떨어지고 이듬해 1~3차를 한꺼번에 통과했다.각종 위기 때마다 차출돼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 금융정책과에서 일하면서 그의 공직생활이 본격 시작됐다. 때마침 기회를 얻어 프랑스 국립행정학교(ENA)에서 국제행정학을 공부했다. “프랑스 정부가 한국 공무원에게 ENA에서 공부할 기회를 줬는데 그 첫 번째 기회를 제가 잡았죠.”프랑스에선 ENA 출신에게 부지사 수습 기회를 주는 경우가 많았다. 김 회장도 ENA 교육을 계기로 3개월간 이블린주 부지사 현장 수습을 했다. “ENA에서의 배움은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큰 경험이 됐습니다.”잠시 막걸리로 목을 축인 그는 꼬막을 서너 점 크게 집어 맛본 뒤 말을 이어갔다. 금융관료 시절 그는 1997년 외환위기, 1999년 대우사태, 2008년 금융위기 등을 모두 겪었다. 당시 금융정책과장이던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과 함께 위기 해결에 앞장선 핵심 관료로 꼽힌다. 김 전 위원장이 대책반장이라면, 김 회장은 현장반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금융위 금융서비스국장을 맡아 합리적으로 일을 잘 챙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말 치열하게 일했습니다. 세 번의 위기를 거치면서 깨달은 것은 위기 해결을 위해선 관련자가 모두 머리를 맞대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그는 잠시 젓가락을 내려놓고 옷에서 옛날 신문을 꺼냈다. 1998년 6월 동남 동화 대동 충북 경기 등 은행 5곳이 문을 닫은 날의 한국경제신문 보도(사진).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신문에서 접한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김 회장은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은행이 문을 닫는다는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며 “당시 상황실장을 맡아 연일 밤을 새우며 회의했다”고 말했다. “‘모피아(옛 재무부와 마피아의 합성어)’라는 수식어가 부담스럽진 않냐”는 질문에는 “관료시절 경험은 인생의 큰 재산”이라며 말을 이어갔다. “모피아라는 말이 좋은 자리를 꿰차고 과실만 따먹는다는 부정적 의미가 크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진정성 있게 일하는 관료도 많다는 걸 몸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관료시절 가장 큰 영향을 받은 3명을 꼽아달라는 말에 그는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유지창 전 산업은행 총재와 진동수 전 금융위원장,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의 이름을 댔다. 김 회장은 이들을 ‘선배이자 스승’이라고 했다. “유 선배가 금융감독위원회 금융정책과장을 할 때 사무관으로 있었는데 따뜻한 인품에 감동했지요. 진 선배와 김 선배는 논리적이고 지침이 명확해서 업무를 많이 배웠고요. 제 스승들입니다.”젊은 직원들에게 경험 많이 쌓을 것 당부고비는 끈질기게 찾아왔다. 그는 2011년 부산저축은행 부실 사태 때 구속돼 290일간 수감 생활을 했다.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아 당시 금융정보분석원장(FIU)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2013년 10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며 명예를 회복했지만 그에겐 여전히 고통스러운 기억이다.그는 수감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고 했다. ‘10년 일기장’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7년째 짧든 길든 매일 잠들기 전 일기를 쓰고 있다. 수감 시절 일기에는 선후배들에게 받은 편지도 다닥다닥 붙어 있다. 자신을 생각해주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버텼다고 했다.김 회장은 인생에서 중요한 키워드를 공정, 배려, 경험으로 꼽았다. 그는 “세상 어떤 일도 결코 혼자서 해낼 수 있는 것은 없다”며 “공정하게 접근하고 바라보되, 함께 일하는 동지를 배려하는 마음을 잃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자신의 ‘새로운 동지’가 된 농협금융 직원들에게 이런 점을 강조하고 싶다고 했다. 특히 젊은 직원들을 위한 조언으로는 “경험만큼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은 없다”며 “여행을 많이 다니고 책도 많이 읽으라”고 말했다.그는 지난 4월 농협금융 회장에 선임된 이후 ‘농협인’으로서 직원들과 머리를 맞대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보고서 문화를 없애고 토론 문화를 만들었다. 보수적이고 의사소통 결정이 늦은 관행을 바꾸기 위해서다. 회장 보고 때도 회장과 실무자가 토론을 벌인다.농협금융은 내년에 사상 최대 순이익(1조5000억원)을 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머리를 맞대면 못 해낼 게 없다는 생각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직원들과 열심히 뛸 겁니다. 물론 예기치 않은 고비가 찾아올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또다시 잘 헤쳐나갈 겁니다.”■약력△1957년 전남 보성 출생△1976년 광주제일고 졸업△1981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1981년 외환은행 입행△1983년 행정고시 합격(27회)△1985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졸업△1991년 프랑스 국립행정대학원 국제행정학과 졸업△1994년 재정경제원 금융정책과△1998년 금융감독위원회 법규과장△2001년 금융감독위원회 은행감독과장△2001년 대통령 비서실 서기관△2004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과장△2008년 금융위원회 금융서비스국장△2009년 한나라당 수석전문위원△2011년 금융정보분석원장△2014년 법무법인 율촌 고문△2018년 농협금융 회장■농협금융은…농협금융은 2012년 농협중앙회가 신용부문과 경제부문을 분리하면서 신용부문을 총괄하는 조직으로 출범했다. 농협금융은 농협은행, 농협생명, 농협손해보험, NH투자증권, 농협캐피탈, NH저축은행, 농협리츠운용, NH아문디자산운용 등 8개 자회사를 두고 있다.자산 규모는 416조원으로 다른 금융지주에 비해 작지만 은행 점포망이 다른 금융지주 소속 은행을 압도한다. 농협은행 점포는 1147개로 국민은행 KEB하나은행보다 많다. 여기에 지역 농협이 운영하는 점포까지 합하면 점포망에선 국내 최대 네트워크를 자랑한다. 농협금융의 전체 이용자는 3000만 명에 달하며 지역 농·축협을 포함한 금융 네트워크는 전국 6000여 개다.■김광수 회장의 단골집 만석집톡 쏘는 홍어삼합에 꼬막무침 일품톡 쏘는 홍어삼합에 싱싱한 꼬막무침, 고등어구이, 된장찌개에 이르기까지 모두 국산 식재료로 조리하는 한식 전문점이다. 시골 밥상을 한 상 가득 차려놓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식당 경력 30년 된 사장이 2003년부터 15년째 운영 중이며, 고들빼기김치 하나까지 손수 담근다.이 집의 메뉴는 정식과 단품 메뉴로 나뉜다. 정식은 살이 오른 싱싱한 고등어구이를 중심으로 고들빼기김치에 노릇하게 부친 호박전과 홍어전, 버섯무침 등 반찬이 나온다. 쌀밥에 온갖 반찬을 얹어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점심에는 1인당 1만4000원, 저녁에는 1만5000원에 판매한다.저녁에는 홍어삼합, 꼬막무침, 돼지고기 두루치기 등을 각 3만원에 판매하는 단품 메뉴가 인기다.막걸리 안주로 이만 한 게 없다는 게 주변 직장인들의 평가다. 메뉴판에는 없지만 산낙지가 먹고 싶을 때는 하루 전 전화로 예약하면 ‘맞춤식’으로 제공해주기도 한다.정지은 기자 jeong@hankyung.com
“1조원을 5년간 빌리면 이른바 ‘자금조성비’로 6000억원이 빠져나갔습니다.”1999년 2월4일 국회 한보사건 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그는 ‘자물통 입’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1997년 외환위기 이전 기업금융 시장의 놀라운 실상을 폭로한다. 1990년대 중후반 30대 대기업그룹의 3분의 1이 쓰러진 배후에는 천문학적인 ‘유령’ 금융비용이 존재했다는 주장이었다.그는 1991년 ‘금리 자유화’를 전후로 빠르게 성장한 중견그룹들이 편법적인 단기금융에 의존해야 했다고 털어놨다. 정부의 오랜 은행 통제와 소수 대기업그룹의 금융 독점을 향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청문회 막바지엔 “거짓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사형에 처해도 괜찮다”고 단언했다. 외환위기 이전 한국 자본시장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그림자금융 키운 ‘공(公)금리’“은행에서 1조원을 대출하면 돈을 다 안 줍니다. 7000억원은 지급보증(어음)으로 내줍니다.”횡령과 뇌물공여로 수감 중이던 정 전 회장은 은행들의 ‘꺾기’ 관행으로 입을 뗐다. ‘지출증빙’을 찾을 수 없는 1조원의 행방을 추궁당하자 나온 답변이었다.꺾기는 금리 자유화 이전 은행들이 수익 증대를 위해 썼던 변칙 영업이었다. ‘공금리’와 실세금리 두 개의 금리가 존재하던 당시 현금을 대출금보다 적게 내줘 실질 이자수익을 늘리려 했다. 정부가 실세금리보다 훨씬 낮은 공금리로 예금과 대출을 규제해 생긴 부작용이었다. 당시 한국은행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의장은 재무부 장관이었다.정부의 인위적인 저금리 정책은 전략산업 투자를 촉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만성적인 대출수요 과잉이라는 심각한 부작용이 뒤따랐다. 굴지의 대기업그룹을 제외한 많은 기업이 은행에 접근하지 못하고 제2금융권에서 자금을 조달했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사채 시장으로 달려가야 했다.정 전 회장에 따르면 한보는 은행의 지급보증어음을 들고 다시 단자회사(투자금융회사)를 찾아갔다. 단자회사는 종합금융회사(종금사)와 함께 어음을 가져오면 일부 수수료를 떼고 현금으로 바꿔주는 할인 업무를 했다. 자금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단자회사들은 어음 강매 등 은행보다 가혹한 꺾기를 하거나 사채 시장의 자금 모집책인 ‘전문인’을 연결해줬다. 전문인은 한보에 1억원당 분기에 300만원, 연 이자로 따지면 12%의 자금조성비를 요구했다. 이 자금조성 서비스엔 거래 증거를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따라붙었다. 기업은 매년 늘어나는 금융비용을 분식 회계를 통해 채워넣어야 했다.부분적 금리 자유화“금리를 자유화하지 않고선 통화 관리가 거의 불가능합니다.”(1988년 7월 사공일 재무부 장관)두 개의 금리로 인한 기업금융시장의 부조리는 1990년 전후 극에 달했다. 1980년대 중반 낮은 금리·유가·원화가치 등 ‘3저(低) 호황’은 기업의 덩치와 산업 복잡성을 키웠다. 우량 중소기업 사장들이 “금융자원 배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는 일이 잇따랐다. 금리의 가격결정 기능 부재로 현금이 생산적인 분야로 흘러가지 못했다.세무공무원 출신인 정 전 회장은 유동성 위기 때마다 정치권 로비를 통해 문제를 해소하고자 했다. 1991년 터져나온 노태우 정부 최악의 정경유착 비리인 ‘수서 사건(한보그룹 택지 특혜분양)’은 이 같은 고리를 만천하에 드러낸 계기였다.1987년 6월 항쟁은 정치에 이은 경제 민주화 요구를 고양했다. 당시 ‘우루과이라운드(UR)’로 대변되는 세계화 흐름도 정부를 압박했다. 1980년대 말 한국은행의 중립성을 보장하라는 ‘한국은행법 개정 100만인 서명운동’ 전개는 정부의 인위적인 통화정책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시사했다.미국 UCLA에서 수학한 사공일 재무부 장관은 문제를 인식하고 1988년 12월 대출금리의 즉시 자유화를 시행한다. 하지만 정부가 1년 만에 창구지도에 나서면서 통화정책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급작스러운 경기 위축과 물가상승 때문이었다. 사공 장관은 이듬해 교체된다.시기를 더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한 노태우 정부는 1991년 공금리와 실세금리 격차가 줄어든 시점을 기회로 다시 금리 자유화에 나섰다. 1996년까지 순차적으로 금리를 완전 자유화한다는 구상이었다. 자유화 첫 타자는 단자회사의 기업어음(CP)이었다. 만기가 짧고 거액인 상품부터 부분적으로 자유화하는 게 금융시장의 충격을 줄일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런 비대칭적 자유화 결정은 나중에 엄청난 오판으로 비판받았다.부실기업의 ‘독사과‘CP 금리의 자유화는 곧바로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이어졌다. 공금리보다 높은 이자를 돌려주는 CP는 낮은 예금금리에 불만을 품은 시중 자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은행의 신탁계정(투자자가 운용을 맡긴 돈)과 기업들도 왕성한 식욕을 나타냈다.경수투자금융, 반도투자금융, 동해투자금융 등 CP를 취급하는 20여 곳의 단자회사는 관련 상품을 경쟁적으로 판매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영업 대상도 점차 위험 대기업군으로 확대했다. 1990년 13조원 수준이던 CP 잔액은 1996년 65조원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부실 대기업그룹은 새로운 자금 조달 시장의 성장을 반겼다. 은행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기업들은 설움을 토해내듯 CP를 찍어댔다. CP는 발행 신고 의무가 없어 정부의 감시에서도 자유로웠다. 수요만 있으면 무제한 발행도 가능했다. 빚에 허덕이는 20~30대 그룹사의 ‘맞춤형’ 서비스였다.CP 시장의 매력은 추가적인 금리자유화 이후에도 줄어들지 않았다. 19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군사정부와 차별화한 경제정책으로 ‘신경제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그해 곧바로 모든 여신금리를 자유화했다. 은행들은 설립 후 처음으로 서로 다른 여수신 금리를 제시하며 경쟁 체제로 들어갔다. ‘공금리’란 표현도 1993년 3월 인하(일반대출 기준 기존 연 9~11%→8.5~10%)를 끝으로 사라진다.하지만 정부는 계속 창구지도를 통해 은행 금리를 규제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은행권을 통한 저리의 장기자금 공급 기능은 작동하지 않았다. 반대로 단자회사들은 신경제 조치에 따라 무더기로 종합금융회사 인가를 얻어 업무 영역을 확대했다.사채시장과 연계한 CP 시장의 성장은 부도 직전 기업까지 살려냈다. 정 전 회장이 언급한 자금조성비는 단자회사와 사채시장의 연결고리를 보여준다. CP 시장은 재계 전반에서 급속도로 불어나는 부실을 감추는 마술을 부렸다. 고금리에 취한 투자자는 현실을 외면했고,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금융감독 당국은 관련 규제를 계속 완화했다.억눌린 부실의 폭발1995년 1월. 멕시코 경제위기가 미주와 유럽을 지나 필리핀 외환시장까지 마비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내 금융회사들이 글로벌 경제 불안의 불똥을 염려하던 그해 2월 단기금융시장 사상 최대의 금융사고가 터졌다. 8000억원의 빚에 시달리던 덕산그룹의 최종 부도 소식이었다.부실기업의 ‘현금 창구’ 역할을 하던 CP 시장에선 나쁜 소문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일부 단자회사는 부도설이 도는 기업의 CP 만기를 점점 짧게 끊어주며 대응했다. 부실기업의 호흡은 갈수록 가빠졌고, 어느 순간 단자사들은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CP 회수에 나서기 시작했다.억눌렸던 부실은 1997년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가장 먼저 재계 10위(1996년 대차대조표 공정자산 기준) 한보그룹이 5조7000억원의 부채를 안고 1월 최종 부도 처리됐다. 당시 단기차입금 비중은 40%에 육박했다. 그해 4월에는 삼미그룹(자산총액 26위·부도)과 진로그룹(19위·부도유예협약)이 쓰러졌다. 5월 대농그룹(44위·부도유예협약), 7월 기아그룹(8위·부도유예협약)이 무너졌다. 11월에는 해태그룹(24위)과 뉴코아그룹(27위)이 화의를 신청했다.기업금융시장은 완전히 멈춰섰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불안이 한국 경제 전체를 덮쳤다.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