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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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제조업체 마케팅 부서에서 근무하는 이 대리(27)는 요즘 퇴근하면 예능 프로그램부터 챙겨본다. 송년회 사회를 맡았기 때문이다. 마이크를 잡고 각종 이벤트를 진행해야 한다. 이 대리는 “팀별로 삼삼오오 진행하던 송년회가 올해부터 회사 전체 직원이 참여하는 행사로 확대됐다”며 “사장님까지 참석하는 자리에서 사회를 보는데 말주변이 없어 걱정”이라고 했다. “연말이라 업무도 바쁜데 MC 진행까지 공부해야 되니 죽을 맛이에요.”

송년회 시즌이 시작되면서 김과장 이대리들이 또 다른 숙제를 떠안았다. 이색 송년회를 위해 공연이나 볼링장, 가상현실(VR) 게임장을 잡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다. 공연을 보더라도 ‘행사 후 음주’가 관행처럼 굳어지면서 송년회는 여전히 ‘술년회’라는 불만도 여전하다.

◆이색송년회 준비에 지친 김과장들

회식 대신 워크숍이나 영화 관람 등 차별화된 송년회가 오히려 더 피곤하다는 김과장 이대리들의 하소연도 많다. 건설회사에 다니는 최 과장(36)은 ‘이색 송년회’ 얘기를 들을 때마다 씁쓸한 기분이 든다. 최 과장은 이달 초 있었던 송년회를 잊지 못한다. 고문과 팀장님을 모시고 방탈출 카페에 다녀왔다. 어두운 방에 들어가니 ‘어르신들’께서 당황하기 시작했다. 가장 연세가 많은 고문은 카페에서 만지지 말라는 것들을 만지기 시작했다. 숨겨져 있는 단서들은 찾기 어렵다보니 눈에 보이는 건 닥치는 대로 건드렸다. 카페 직원들이 여러 차례 투덜댔다. “미안하다”는 말을 열번쯤 하고서야 겨우 방을 탈출했다. 같이 갔던 어르신들도 “왜 이런 데를 왔어?”라는 핀잔을 줬다. 북적이던 카페를 나와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고 있을 때 팀장이 담배를 피워 물며 말했다. “자! 이제 술이나 먹으러 가자.”

무역회사에 근무하는 양 대리(31)도 “이번 송년회 땐 술만 먹지 말고 신세대처럼 놀아보자”고 제안했다가 끔찍한 경험을 했다. “역시 젊은 사람이라 다르다”는 칭찬과 함께 제안이 받아들여진 것까진 좋았다. ‘오락부장’에 임명돼 송년회 프로그램을 짜보라는 팀장의 지시를 받아 VR 게임장을 예약했다. 하지만 게임장에 도착하자 팀장의 태도가 돌변했다. 게임에 적응하지 못한 팀장이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양 대리는 “술집에 앉아 소맥(소주+맥주)를 말아 마시는 게 구시대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게 훨씬 더 편하다는 걸 깨달았다”며 “세대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술자리 송년회도 여전

이색송년회가 유행이지만 여전히 송년회의 대세는 회식과 술자리다. 유통회사 영업팀 3년차 김모 주임(31)은 11월 말부터 거의 비몽사몽이다. 밤늦게 술자리를 하고 다음날 술이 깰 만하면 다시 저녁자리로 불려 나가는 일정이 반복되고 있다. 팀장은 이런저런 이유로 계속 저녁 약속을 잡는다. 덕분에 한 장 남은 달력도 술 약속으로 빼곡하다.

시중 은행 기업 영업부에 근무하는 이 과장(36)은 지난 한달 간 체중이 3㎏이나 늘었다. 김 과장이 담당하는 기업의 각종 부서들과 잡은 송년회가 20여건 이상 이어졌기 때문. 김 과장은 “외부 거래처 사람과의 송년회는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난다”며 “간 보호제를 먹고 술을 마시러 갈때면 씁쓸할 때가 많다”고 했다.

건설회사에 근무하는 김 모 과장(31)은 요즘 달력을 보면서 ‘참석할 송년회’와 ‘빠질 송년회’를 고르고 있다. 고등학교 동창, 대학교 동창, 동아리, 회사 동기 등 다양한 송년회 날짜가 잡히고 있지만 겹치는 날짜가 많다. 약속이 겹치는 날엔 혼자 바쁜척 하는 것 같아 눈치가 보인다. 반면 약속 없는 날엔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여겨질까봐 불안하기도 하다.

◆마라톤·김장 기부 이색송년회 열풍

‘노는’ 송년회만 있는 건 아니다. 외국계 제약사에 다니는 배 모 과장(36)은 회사 게시판에서 재미있는 공지 글을 봤다. 연말 송년회를 루프탑 오뎅파티로 대신한다는 것. 회사 옥상에서 따끈한 오뎅과 함께 사케(청주)를 가볍게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형식이다. 배 과장은 “이 같은 부담없는 회사 송년 행사가 2차 3차까지 가는 묵직한 송년회보다 나은 것 같다”며 “회사 옥상에서 오뎅과 사케를 먹을 줄은 생각도 못해봤다”고 즐거워 했다.

한 광고회사는 송년회 대신 소아암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들에게 수익금을 전달하기 위한 이색 기부 마라톤으로 올해 송년회를 대신하기로 했다. 이태원에서 일요일 아침에 모여 5㎞를 함께 뛰고 간단히 간식을 먹고 끝나는 일정이다. 술자리 회식비를 마라톤 참가비로 쓰고 그 돈을 소아암 어린이 치료비에 보태기로 했다.

◆업황따라 쌀쌀한 송년회 열기도

여의도 증권회사에 다니는 주 대리(29)는 작년이 그립다. 증시가 활황이던 작년에는 연말보너스를 기대하면서 연이은 송년회를 했다. 하지만 올해는 부진한 주식시장에 송년회 약속도 뚝 끊겼다. 주 대리는 “연말에도 시황이 안좋아 회사 분위기가 무겁다”며 “점심에 간단하게 식사하는 것으로 송년회를 갈음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자동차 부품회사는 매해 송년회가 열리는 즈음 임원 인사가 난다. 며칠전 송년회에선 해임 통보를 받은 한 전무가 갑작스레 일어나 “오늘은 저의 마지막 날입니다”라고 말해 분위기가 숙연해졌다고 한다. 이 회사 최 과장은 “해임된 전무가 새벽 두 시까지 붙잡고 ‘내가 왜 가야 하냐’고 하소연을 해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피곤하기도 했다”고 했다.

송년회 자체를 취소하는 기업들도 있다. ‘미투 운동’, ’52시간 근로’ 등이 겹치면서 회식 자리가 사실상 사라진데다 부득이한 식사 자리도 ‘최대한 간단하게 하자’는 분위기가 자리 잡아서다. 중견 화장품 회사에 다니는 박 과장(37)은 “올해엔 부서 송년회를 하더라도 회사 근처 식당에서 조용히 밥만 먹을 것 같다”며 “연말이 너무 조용히 지나가 아쉬운 마음도 든다”고 말했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