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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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마트, 백화점, TV 홈쇼핑 등 유통산업의 주력 소비자는 30~50대 여성이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장 보고 쇼핑하는 영역에선 아직 여성이 절대적 힘을 가진다.

하지만 유통 사업을 하는 기업으로 가면 사정이 확 달라진다. 국내 주요 유통 기업에선 여성 임원을 찾기 힘들다. 최고경영자(CEO) 수는 한 손에 꼽는다. 작년 10월 홈플러스 대표에 오른 임일순 사장은 매우 드문 경우다. ‘오너 경영자’를 제외하고 여성으로는 국내에서 처음 유통 기업 대표가 됐다. 우리 사회의 유리천장을 또 하나 깨뜨린 인물이다. 그것도 매출 10조원, 직원 수 2만4000여 명에 달하는 홈플러스를 맡았다. 여성 CEO가 있는 국내 기업 중에는 외형이 가장 크다. 지난 3일 서울 한남동에 있는 한정식집 ‘단비’에서 임 사장을 만났다.

모토로라에서 첫 사회생활

“안녕하세요. 정말 반갑습니다.”

임일순 홈플러스 사장 "착한제품으로 유통 판도 바꿀 것"
임 사장이 약속시간보다 먼저 와 반갑게 맞았다. 푸근한 인상이다. 지난 3월 기자간담회 때 받았던 첫인상과 딴판이다. 귀 위까지 짧게 친 커트 머리, 목 중간까지 올라오는 터틀넥 니트, 격식을 갖춘 재킷 등은 그때와 다를 게 없었다. 달라진 것은 말투였다. 건조하고 딱딱한 느낌이 없었다. 정감 있고 붙임성 있게 말을 이어갔다. “100명 넘는 기자들이 앞에 있어 너무 긴장했었나 봐요”라며 호호 웃었다. 다소 어색했던 분위기는 금세 풀렸다.

“이 집은 오래되지 않았는데 제대로 음식 하는 것 같아요. 몇 번 와보고 입맛에 맞아 종종 찾습니다. 이 김치 한번 드셔보세요. 국물이 기가 막힙니다.”

열무 물김치를 대뜸 권해서 국물부터 마셨다. 감칠맛이 혀를 감았다. 연신 먹게 됐다. 시원한 열무 물김치로 빈속을 달랬다.

유통업계 첫 여성 CEO의 첫 직장이 궁금했다. 1964년생인 임 사장은 연세대 경영학과 83학번이다. 그 시절만 해도 대기업 공채에서 여성을 뽑는 곳이 적었다.

“대학 4학년 때 미국 기업 모토로라 케이스 스터디를 했습니다. 대단한 기업이었죠. 방위산업, 위성, 통신, 반도체 등 첨단 기술을 다 했으니까요. 알면 알수록 배울 게 많았습니다. 그런데 학교 게시판에 모토로라 채용 공고가 덜컥 뜬 거예요. 외국계라 남녀 구분도 없었습니다. 바로 원서를 냈는데 붙었습니다.”

첫 직장 생활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PC 구경을 하기도 힘들었던 그때 모토로라는 전 직원에게 PC를 내줬다. 홍콩 등 해외 사무소와 소통할 때는 메신저를 썼다. 사무실마다 텔렉스가 있어 수시로 문서를 보내고 받았다. 그가 맡은 일은 반도체 영업이었다. 모토로라 반도체를 전자회사에 팔아야 했다. 임 사장은 “사실 잘 못 했다”고 회상했다.

“상순이(상대 나온 여성을 뜻하는 은어)가 엔지니어 만나서 영업을 하려니 도통 말이 통해야 말이죠. 다른 영업은 잘했을 텐데. 3년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회사를 옮겼어요.”

테이블 위에 육전이 올라왔다. 이 집의 간판 음식이다. 함께 나온 얇게 썬 파채를 얹어 한입에 넣었다. 육전의 느끼함을 파전이 잡아줘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 났다. 임 사장이 가져온 와인을 곁들였다. 홈플러스가 영국 주류 기업 ‘베리 브러더스 앤드 러드’로부터 들여와 판매 중인 ‘더 와인 머천트’다. 육전과 레드와인은 꽤 괜찮은 조합이란 생각이 들었다.

앞만 보며 달리다 아픔도 겪어

임일순 홈플러스 사장 "착한제품으로 유통 판도 바꿀 것"
임 사장은 이후 종금사와 미국 PC 기업 디지털이퀴프먼트코리아(현 HP) 등을 거쳐 1998년 처음 ‘유통’에 입문했다. 당시 막 한국에 진출한 코스트코코리아에 들어갔다.

그는 열심히 일했다. ‘너무 열심히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했다. 코스트코코리아에 다닐 때다. 서른일곱에 둘째를 낳았다. 애 볼 시간이 없어 시부모가 애들을 키워줬다. 어느 날 회사에 시부모가 찾아왔다. 급하게 뛰어나갔더니 시어머니가 둘째를 안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얼굴 한번 제대로 못 봤으니 애 좀 한번 안아 보렴” 하고 건네줬다. 임 사장은 애를 안고 몇 분을 멍하니 있었다. 그러곤 다시 넘겨줬다. 일하러 다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아이를 떼어 놓는 게 너무 힘들었다. 시부모는 공항에서 배웅하듯 임 사장 등을 떠밀었다.

그는 딸 둘을 10여 년 전 미국에 유학 보냈다. 한국에 있으면 잘 가르칠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계기도 있었다. 아이들과 대화가 안 되기 시작하면서다.

“어느 날 집에 와서 말을 하는데 회사 언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은 점점 말이 없어졌죠. 강요하고, 지시하고. 뭐 하는 건가 싶더라고요.”

미국에 간 두 딸은 잘 적응했다. 6개월 뒤 기숙사로 찾아갔더니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말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었다.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딸이 그래요. 엄마를 형용사로 얘기해 본다면서. 첫 번째는 ‘열심히 일한다’, 두 번째는 ‘무진장 열심히 일한다’고.”

임 사장은 2006년 편의점 바이더웨이에 들어갔다. 주로 외국계 기업에서 20년을 일한 뒤였다. 한국 기업에서 꼭 일해야겠다는 결심이 섰기 때문이다.

“아픔이 한 번 있었어요.” 한 외국계 헬스케어 기업에서 일할 때다. 그는 사장 후보로 지정돼 있었다. 미국인 사장이 후견인이었다. 국내외를 돌며 더 열심히 뛰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에 오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후견인 사장이 대하는 태도가 차가웠다. 조금씩 사이가 멀어져 걷잡을 수 없어졌다.

“나중에 보니 집(회사)을 비운 사이 누군가 이간질을 했던 모양이에요. 그분하고 참 좋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었습니다. 결국 회사를 떠나야 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회사를 나와서도 6개월을 놀았습니다. 분이 풀리지 않아 외국에도 나갔어요. 한국 기업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도 그때 한 겁니다.”

“스페셜 매장으로 유통 판도 뒤흔들 것”

홈플러스는 지난달 대구점을 ‘홈플러스 스페셜’이란 매장으로 바꿨다. 창고형 할인점, 대형마트 두 개를 섞어 놓은 듯한, 국내에서 처음 시도하는 ‘하이브리드 디스카운트 스토어’다. 창고형 할인점처럼 대용량 상품을 저렴하게 판매하면서 낱개 상품, 소포장 상품도 가져다 놓은 게 특징이다. 홈플러스는 연내 20곳을 스페셜 매장으로 전환할 예정이다.

이 같은 매장 형태는 임 사장 아이디어다. 코스트코코리아에서 일한 경험에서 비롯됐다. 입사 후 칫솔을 사기 위해 매장에 내려갔다. 12개 묶음 포장밖에 없었다. 한 개만 필요했지만 ‘애사심’에 그냥 샀다. 그러자 치약이 문제였다. 치약도 12개 묶음밖에 없었다. 결국 12개 칫솔과 12개 치약을 다 쓰지도 못하고 회사를 나와야 했다.

“코스트코는 좋은 회사지만, 소비자에게 상품을 강요하는 게 단점입니다. 코스트코에서 장을 보면 필요 없는 것을 잔뜩 사야 해요. 채소 같은 것은 동네 슈퍼에서 다시 장을 봐야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접점을 찾은 거죠. 저렴한 대용량, 편리한 소용량을 함께 판매하는 겁니다.”

홈플러스 스페셜을 기획하면서 임 사장이 가장 많이 신경을 쓴 것은 협력사다. 대용량 상품을 팔려면 가격을 확 낮춰야 했다. 하지만 협력사를 쥐어짤 수는 없었다. 임 사장은 “협력사에 단 1원도 납품 단가를 낮추라고 요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기본적인 신뢰가 무너지면 회복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신 운영 효율을 높이는 쪽을 택했다. 산더미처럼 물건을 쌓아 진열 비용을 아꼈다. 필요 없는 것은 다 걷어냈다. 생수 등 무겁고 부피가 큰 것은 지게차가 밑을 받칠 때 쓰는 팰릿째로 올렸다. 상자 그대로 진열하기도 했다. 판관비를 아끼기 위한 대대적인 혁신 운동을 벌였다.

그는 유통의 경쟁력은 결국 ‘상품’이라고 본다. 과거 월마트, 까르푸 등이 한국 시장에서 실패한 것도 상품이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봤다.

“싸구려 상품을 저렴하게 팔아 봐야 국내 소비자 눈높이를 따라갈 수 없어요. 좋은 상품을 싸게 팔아야죠. 코스트코가 한국에서 성공한 것도 결국 상품이 좋기 때문이거든요. 홈플러스 스페셜은 좋은 상품, ‘착한 가격’으로 국내 유통업계 판도를 뒤흔들 것입니다.”

■ 임일순 홈플러스 사장은

△1964년 서울 출생
△1983년 선일여고 졸업
△1987년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1999년 연세대 대학원 MBA 취득
△1986년 모토로라 입사
△1988~1998년 디지털이퀴프먼트코리아
△1998~2002년 코스트코코리아 CFO·재무부사장
△2006~2010년 바이더웨이 CFO
△2010~2013년 호주 엑스고그룹 CFO
△2015~2017년 홈플러스 재무부문장 (CFO·부사장)
△2017년 5월 홈플러스 경영지원부문장 (COO·수석부사장)
△2017년 10월 홈플러스 대표이사 사장 (CEO)

■홈플러스는

국내 2위 대형마트… 전국 142개 매장 보유


홈플러스는 이마트에 이은 국내 2위 대형마트다. 전국에 142개 매장을 보유 중이다. 2015년 대주주가 영국 테스코에서 사모펀드 MBK로 바뀌었다. MBK로 인수된 첫해 2590억원의 적자를 냈던 홈플러스는 이듬해 3209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둬 ‘턴어라운드’했다. 작년에도 2000억원대 이익을 내 흑자가 지속됐다. 지난달 창고형 할인점과 대형마트의 장점을 결합한 ‘홈플러스 스페셜’이란 새로운 형태의 매장을 열었다. 연내 20곳까지 스페셜 매장을 확대할 계획이다. 임일순 홈플러스 사장은 “앞으로 3년간 두 자릿수 매출 증가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일순 홈플러스 사장 "착한제품으로 유통 판도 바꿀 것"
■임일순 사장의 단골집 단비

파채와 함께 곁들이는 한우육전… 담백한 맛 일품

임일순 홈플러스 사장 "착한제품으로 유통 판도 바꿀 것"
서울 한남동에 자리한 ‘단비’는 간장게장과 자연산 도다리회, 참가자미 세꼬시부터 점심·저녁 코스요리까지 맛볼 수 있는 한정식집이다. 경북 포항 출신으로 일식집을 운영하던 어머니와 이탈리아 음식점을 꾸리던 딸이 함께 운영한다. 그물이 아니라 낚시로만 잡아올린 생선을 직접 조달해 싱싱한 재료로 음식을 만든다. 2014년 12월에 문을 열었다.

인기 메뉴는 한우육전(5만원)이다. 냉동하지 않은 한우 뒷다리살을 사용해 주문을 받자마자 구워내온다. 부드러운 보섭살을 사용해 담백함을 살렸다. 파채도 함께 곁들여져 깔끔하게 즐길 수 있다.

참가자미 세꼬시(5만원, 2인 이상 주문)도 이 집 대표 메뉴다. 함께 나오는 묵은지나 깻잎장아찌에 싸서 꼬들꼬들한 식감을 즐길 수 있다. 살이 꽉 찬 신안산 게로 만든 간장게장도 별미로 알려져 있다.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코스요리(점심 3만8000원·저녁 8만7000원)도 마련돼 있다. 여름에만 파는 민어전(5만원)과 겨울에만 맛볼 수 있는 굴전(5만원)도 있다. 나막스찜(6만5000원)을 비롯해 꽃게탕(9만8000원) 등 제철 해물을 담아낸 경상도식 메뉴가 정갈해 손님 대접에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다.

안재광/이유정/안효주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