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7개월여 수사 끝에 황창규 KT 회장의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비자금을 조성한 뒤 회사에 유리한 입법과 정책을 유도하기 위해 임직원 명의로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한 혐의다. 황 회장은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정권 교체기마다 수난을 겪어온 ‘KT 회장 잔혹사’를 황 회장이 피해갈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고위임원 동원… 불법 쪼개기 후원”

7개월 수사 끝 '불법 후원금' 영장… 황창규 "모르는 일"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정치자금법 위반과 업무상 횡령 혐의로 황 회장 등 7명을 입건했다고 18일 발표했다. 황 회장과 KT의 대관업무를 담당하는 CR부문 전·현직 임직원인 구모 사장(54), 맹모 전 사장(58), 최모 전 전무(58) 등 4명에 대해서는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은 이들이 2014년 5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법인자금으로 상품권을 사들인 뒤 되파는 ‘상품권깡’을 통해 비자금 11억5000여만원을 조성했다고 보고 있다. 이 중 4억4190만원이 19~20대 국회의원 99명(낙선자 5명 포함)에게 정치후원금으로 흘러갔다. 의원 한 사람당 보통 100만~500만원을 후원한 것으로 전해진다.

법인이나 단체는 정치자금 기부가 금지돼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해 27명의 임직원 명의로 후원금을 냈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경찰 관계자는 “의원실 보좌진에게 임원 인적사항을 알려주며 KT 자금임을 알렸다”고 말했다.

후원금은 KT의 현안을 다루는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현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 정무위 환경노동위 소속 의원들에게 집중 제공됐다. 이런 가운데 SK-CJ 합병 등 몇몇 사안이 KT에 유리한 방향으로 결론 났다는 게 경찰의 판단이다. 경찰은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정치권으로 수사를 확대할 방침이다.

◆KT 회장 잔혹사, 재연될까

황 회장이 후원 과정을 주도했는지가 쟁점이다. CR부문 임직원은 계획부터 실행까지 황 회장에게 보고하고 지시받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수사 초기부터 혐의를 부인해온 황 회장은 이번에도 “기억에 없으며 CR부문의 일탈행위”라고 해명하고 있다.

경찰이 심사숙고 끝에 칼을 뽑아들었지만 KT는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이다. 긴급이사회 등을 예정하지 않고 있으며 황 회장은 오는 27일 시작되는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 상하이 출장길에 오를 것이라고 밝혔다. 대대적인 압수수색이 연초였는데 이제야 영장을 신청한 것은 증거 미흡 때문 아니겠느냐는 게 KT의 내심이다. 이에 대해 경찰은 “임원들의 진술이 일관되고 황 회장에게 보고한 문건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금액이 크지 않은 데다 적지 않은 기업이 이 같은 후원금 관행에 익숙하다는 점에서 형평성 논란도 제기된다. 경찰 관계자는 “다른 기업들 역시 이런 방법을 썼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지만 아직 드러난 것은 없다”고 말했다. 3년5개월간 4억여원의 후원금이 기업 규모에 비해 그리 크지 않다는 의견도 나온다.

KT 회장은 정권교체기마다 수난을 겪는 자리다. 이석채 전 회장은 연임한 지 1년8개월 만인 2013년 11월 검찰 소환을 앞두고 스스로 사퇴했다. 하지만 횡령 등 그의 혐의는 올해 5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남중수 전 사장도 연임 8개월 만인 2008년 11월 배임수재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며 사임했다.

이현진/이정호 기자 ap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