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헌법 앞에 선 낙태죄… 태아 생명권에 무게 둔 재판관들
헌법재판소는 24일 대심판정에서 지난해 2월 산부인과 의사 정모씨가 제기한 형법상 낙태죄 처벌조항(형법 제269조 제1항)의 위헌 여부를 가리기 위한 공개변론을 열었다. 헌재가 2012년 합헌 결정을 내린 낙태죄 처벌조항에 대해 6년여 만에 다시 위헌 여부 논의에 들어간 것이다.

산부인과 의사 정씨는 2013년 11월~2015년 7월 총 69회에 걸쳐 불법 낙태수술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1심 재판 도중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지난해 2월 직접 헌법소원을 냈다. 형법에 따르면 불법 낙태에 대해 당사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 의사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다만 모자보건법에 따라 질병이나 장애가 있거나 강간에 의해 임신한 사례에 대해선 예외적으로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헌재의 위헌 여부는 단 한번의 공개변론으로 큰 흐름이 결정되기 때문에 이날 낙태죄 찬반론자들은 날선 공방을 이어갔다. 헌재 재판관들은 낙태죄의 위헌여부에 우호적일 것이라는 청구인측의 예상을 깨고 이날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하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청구인측 변호사도 재판관의 물음에 명쾌한 답변을 하지 못해 태아의 생명권에 대해선 헌재가 기존 입장을 고수할 것이라는 시각도 나온다. 재판관들은 낙태와 관련해 남성들의 책임과 미혼모에 대한 정부의 지원 등도 강조했다.

이날 변론의 쟁점은 태아의 생명권이었다. 정씨를 대리한 청구인 측 변호사들은 “태아가 출산하기 전까지는 사람이 아니고 출산 후에야 법적인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며 “낙태죄 처벌 조항은 원치 않는 임신의 유지와 출산을 강제해 임산부의 자기운명결정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또 “실제 낙태죄 처벌 사례가 드물어 사문화한 규정”이라며 “임신 초기의 낙태는 허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법무부 장관을 대리해 참석한 이해관계자 측 정부법무공단 변호사들은 “그동안 헌재는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했고, 헌법 10조에 나온 국가의 기본권 보호 의무에는 태아의 생명권도 포함된다”며 “태아는 자기 자신을 지킬 힘도, 어떠한 목소리도 낼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자신의 심장소리로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태아의 발달단계는 동물과 뚜렷하게 구별되기 때문에 어떤 한 시점을 정해 생명권 보호 범위에서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생명보호 원칙에 따라 의사도 태아를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역설했다. 법무부측은 독일의 연방헌법재판소도 태아의 생명권을 우선시하는 결정을 내렸고 태아의 생명권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고 판결을 내렸다고 소개했다.

헌법재판관들은 태아의 생명권에 대해선 한목소리로 청구인측에 비판적인 시각을 내비쳤다. 주심 재판관인 조용호 헌법재판관은 청구인측에 “헌법 전문에는 국민이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원하는 사람간 성관계를 통해 임신을 하게 되면 태아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는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청구인측에 물었다.

또 그는 "낙태죄 폐지는 '내 몸은 내가 결정한다'는 슬로건 하에서 나왔으며 일반 여성은 자유롭게 삭발하고 얼굴에 성형수술을 할 수 있다"며 "하지만 태아는 내 몸이 아니다"고 꼬집었다. 그는 "태아는 자기 결정권을 가진 존재"라며 "생명을 박탈하는 권한을 주장하는 것이 여성의 권리인가"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청구인측 변호사는 "우리 법은 태아와 사람을 구별하고 있으므로 태아는 법적으로도 생명의 주체라고 보기 힘들다”며 "원치 않는 임신은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또 "낙태죄는 태아의 생명권보다 임산부의 자기결정권만 일방적으로 희생하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조용호 헌법재판관은 "태아는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 예정된 존재로서 청구인측의 주장처럼 사람과 태아를 다르게 볼 것인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며 "임신 중인 태아와 출산을 앞둔 태아의 차이는 단지 '시간'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조 헌법재판관은 "청구인측이 처음 제출한 자료에는 수정후 8주까지는 태아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가 이후 12주로 기준을 바꿨는데, 무엇이 맞느냐"고 물었다. 이에 청구인측은 "의학적인 견해가 달라 혼선이 있었다"며 "12주가 맞다"고 답했다.

이진성 헌법재판소장 역시 태아의 생명권에 대해선 조 헌법재판관과 한 목소리를 냈다. 이진성 소장은 “보통 임신하면 초음파 사진과 동영상을 가족과 함께 보면서 태아의 심장박동소리를 듣는다”며 “그런 태아가 생명권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보나”라고 청구인측에 질문했다. 청구인측은 “심정적으로 낙태죄 폐지가 '생명에 가혹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헌재는 가급적 과학적 접근보다 규범적인 판단에 집중해달라"고 요구했다.

낙태죄와 관련해 정부 내에서도 여성가족부와 법무부가 대립하고 있다. 여가부는 정부 부처 처음으로 폐지 의견을 헌재에 제출했다. 법무부 측은 “선진국 대부분이 원칙적 금지, 예외적 허용이라는 법체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청구인 측의 주장은 법 개정으로 해결할 사안이지 위헌 논의 대상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종교계 가운데는 천주교계가 낙태와 낙태죄 폐지 반대 입장을 담은 의견서를 헌재에 제출했다. 헌재 판결은 일부 재판관의 임기가 끝나는 9월 이전에 나올 전망으로 재판관 6인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위헌 결정이 가능하다. 헌재는 2012년 8월 낙태죄 합헌 판결 요지에서는 “태아를 성장단계에 따라 구분해 보호의 정도를 달리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며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공익에 비해 결코 중하다고 볼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