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양모씨(29)는 즐겨 하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을 최근 폐쇄했다. ‘매국노’ ‘적폐 세력’ 등 모욕적 악플이 달려서다. 판문점을 찾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숨은 의도가 의심된다는 글을 올린 게 화근이었다. 양씨는 “요즘에는 북한에 대한 비판은 주변 눈치를 보면서 해야 하는 분위기”라며 “여기가 자유국가가 맞느냐”고 푸념했다.

4·27 남북한 정상회담 후 생각이 다른 상대방을 매도하고 배척하는 획일주의가 범람하고 있다. 북의 의도를 경계해야 한다거나 ‘판문점 선언’을 비판하면 ‘적폐’나 ‘미친X’이라는 말폭탄이 쏟아지고 있다.
'평화협정 신중론' SNS에 올리면… 쏟아지는 악플
◆쏟아지는 악플…찢기는 대자보…

남북 정상회담 개최 직전 고려대에서 ‘종전합의, 평화협정은 곧 항복선언이다’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었다. 북한 사람들의 인권을 외면하지 말고 비핵화에 대해 보장받아야 한다는 견지를 담았다. 하지만 이 대자보는 붙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찢기고 말았다. 간호학부 3학년에 재학 중인 이모씨는 “작년에도 페미니즘과 성소수자와 관련된 대자보가 훼손됐다”며 “생각이 다르다고 훼손까지 하는 걸 보면 오싹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온라인에서의 공격은 한층 더 거칠다. ‘판문점 선언 내용이 10·4 공동선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내용의 글을 SNS에 올린 탈북자 출신 기자에게는 ‘죽여버리겠다’ ‘탈북쓰레기’ 등의 악플이 쏟아졌다.

정치인에 대한 비난에서는 적의가 가득하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의원은 ‘판문점 선언의 내용이 부실하다’는 글을 SNS에 올렸다가 악플 폭격을 감당해야했다. ‘정신 나간 여자’ ‘아베의 몸종’ ‘남북 대결구도에 기생하는 반민족 적폐’ 등의 댓글 폭탄을 맞았다. 성폭력적인 육두문자가 섞인 욕설도 많았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판문점 선언을 비판하는 한국당을 해산하자는 청원까지 올라와 3일 만에 5만여 명이 서명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제1야당을 해산해야 한다는 발상은 전체주의적 생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다른 생각 배척은 공론 형성 저해

다른 생각을 말했다고 적으로 공격하는 뒤틀린 행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 같은 획일주의와 공격성은 때가 되면 ‘데자뷔’처럼 반복되는 오래된 현상이다. 가수 아이린은 지난 3월 한 인터뷰에서 여성 차별을 주제로 한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있다고 말한 뒤 ‘골 페미’로 몰리며 악플 공세에 시달렸다. 브로마이드가 불태워지기도 했다.

익명으로 누군가를 공격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그릇된 사회분위기가 만연해 있다는 진단이다. 이병태 KAIST 경영학과 교수는 “인터넷이 점차 소통의 공간이 아니라 갈등의 공간으로 타락하면서 획일주의가 득세하고 있다”며 “생각이 다르다고 벌 떼처럼 때리고 보는 공격적인 행태는 민주시민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고 우려했다.

다수의 이름으로 감행되는 이 같은 폭력적 행태가 합리적 담론 형성을 저해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형준 명지대 정치학과 교수는 “북의 그간 행태를 고려하면 구체적 실천 방안이 없는 이번 합의의 취약성을 지적하는 것은 합리적 비판의 범주”라며 “다수임을 앞세워 과도하게 매도하는 것은 공론 형성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임락근 기자 rkl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