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캠퍼스. 셔틀버스에서 내려 맞은편으로 건너가던 신입생 장모씨(18)는 정차한 버스를 추월하려던 차량에 부딪혀 의식을 잃었다. 가해 차량 운전자인 교직원 문모씨(60)는 경찰에 “버스에 가린 장씨를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문씨는 횡단보도를 앞두고 차량의 속도를 늦추지 않아 갑자기 나타난 보행자를 피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대문경찰서 관계자는 “횡단보도 근처에서 사고가 났기 때문에 일반 도로였다면 중앙선 침범, 과속 등 12대 중과실에 해당돼 가해자가 형사 처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도 “캠퍼스 내 도로는 도로교통법상 도로에 해당하지 않아 단순 보험 처리하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했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남정민 씨는 “평소에도 캠퍼스 내에서 택시나 오토바이가 과속하는 걸 많이 봤다”며 “위험한 상황도 종종 연출되지만 운전자들이 별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14년 인천외고 운동장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블랙박스 화면. 당시 사고 피해자는 내장이 파열되는 중상해를 입었다.
2014년 인천외고 운동장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블랙박스 화면. 당시 사고 피해자는 내장이 파열되는 중상해를 입었다.
교통사고 내도 처벌 없는 ‘도로 아닌 도로’

대학 캠퍼스 내 도로는 도로교통법상 도로가 아닌 탓에 학생을 비롯한 보행자에게는 ‘안전 사각지대’다. 국공유지가 아니라 사유지인 만큼 관리 책임도 경찰이 아니라 해당 대학에 있기 때문이다. 사고가 나도 ‘12대 중과실’이 적용되지 않아 형사 처벌 없이 당사자 간 합의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같은 문제는 대학 캠퍼스뿐만 아니라 아파트 단지와 군부대 내부도로 등도 마찬가지다.

[경찰팀 리포트] 캠퍼스 내 도로엔 '면죄부'… 교통 사각지대에 몰린 학생들
2015년 충남 아산 순천향대 캠퍼스에서도 안타까운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오토바이를 몰고 가던 대학생 김모씨(23·당시 나이)와 동승한 하모씨(23)는 내리막길에 과속하다 차량 진입을 막기 위한 철제 기둥을 피하지 못하고 충돌했다. 튕겨나간 김씨는 도로변 낭떠러지에 떨어져 숨졌고, 하씨도 목숨은 건졌지만 큰 부상을 입었다. 경찰은 “대학 캠퍼스 내에서는 교통 법규를 어겨도 단속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일반 도로에 비해 과속이나 중앙선 침범, 전방주시 의무 태만 등 부주의한 운전으로 사고를 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에 따르면 사립대 12개 대학, 국립대 10개 대학 캠퍼스에서만 2015년 135건, 2016년 102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자료를 제출하지 않은 대학까지 감안할 때 실제 사고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파트 단지 내 교통사고도 마찬가지다. 삼성교통문화연구소에 따르면 2015년 삼성화재가 접수한 교통사고 건수를 집계한 결과 아파트 단지 내 교통사고는 25만1810건으로 전체 교통사고의 16%에 달했다.

그런데도 캠퍼스와 아파트 내 도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는 일반 도로에서의 교통사고와 큰 차이가 있다. 일반인이 아니라 특정인만 통행할 수 있고 자치적으로 관리하는 장소라면 법적인 도로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로 위에 사고만 중과실로 인정하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에 따라 인명 사고를 내도 피해자가 난치·불구·불치·사망에 이르는 중·상해를 입지 않았다면 단순 보험 처리로 끝난다. 일반 도로상 횡단보도 등에서 인명사고를 내면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12대 중과실에 해당돼 엄한 처벌을 받는 것과 대조적이다. 상해를 입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경찰에 신고하더라도 가해자가 종합보험에만 가입돼 있다면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는다.

지난해 10월에도 충북 서원대에서 외부인이 몰던 차량에 학생이 치여 다리가 부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고는 횡단보도에서 발생했고 당시 차량 속도는 시속 40㎞로 과속에 해당했다. 하지만 가해 차량 운전자는 종합보험에 가입돼 교통사고처리특례법에 따라 입건되지 않았다.
지난해 10월16일 오후 7시10분께 대전의 한 아파트에서 카니발 차량(왼쪽)에 치인 김모양(6)을 이송하기 위해 구급차가 대기하고 있다. 이날 사고로 김양은 숨졌다.
지난해 10월16일 오후 7시10분께 대전의 한 아파트에서 카니발 차량(왼쪽)에 치인 김모양(6)을 이송하기 위해 구급차가 대기하고 있다. 이날 사고로 김양은 숨졌다.
경찰 “보행자 보호의무 신설”

이철성 경찰청장은 14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청와대 방송에서 ‘도로 외 구역’에서 ‘보행자 보호 의무’를 도로교통법에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보행자를 발견하면 운전자가 서행 및 일시 정지할 의무를 부여하겠다는 의미다. 보행자 보호 의무를 위반해 보행자가 다치면 가해자를 형사 처벌할 수 있도록 교통사고처리특례법 개정도 추진할 계획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아직 도로 외 구역의 기준이나 범위에 대해선 논의한 바 없다”며 “법무부 국토교통부 등 관련 부처와 협의해 결정할 사항”이라고 말했다.

법조계에선 이 같은 해결책으론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컨대 사고 당사자 한쪽에 100% 과실이 있다면 12대 중과실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 교통사고 전문 변호사는 “올해부터 화물 고정 조치를 위반한 경우도 중과실에 포함했는데 이슈가 될 때마다 하나씩 매번 개정하고, 이미 사고가 난 상태에서 또 개정하는 식으로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도로가 아닌 경우에도 중과실을 적용할 수 있도록 적용 기준을 피해자가 도로에서 중상해를 입은 수준에서 한쪽에 100% 과실이 있는 경우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중상해가 아니면 형사 처벌을 막고 있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을 폐지하는 게 낫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문철 스스로닷컴 대표변호사는 “도로가 아닌 곳에서도 현실적인 교통사고 위험성은 도로와 다를 게 없다”며 “‘차가 다니는 공간’이면 원칙적으로 도로 개념에 포함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종합보험에만 가입하면 12대 중과실로 처벌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을 굳이 유지할 이유가 없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사고난 뒤의 형사 처벌보다 사유지 내 교통안전 관리가 미흡한 것을 개선하는 게 우선이라고 지적한다. 대학과 아파트 내 교통 단속에 경찰이 나설 법적 근거가 없고 대학이나 관리사무소도 차량 과속이나 음주운전 등을 단속해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박준환 국회입법조사처 연구관은 “대학, 아파트, 공장, 발전소 등 도로 외 구역 교통안전 관리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제도 도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박진우 기자 jw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