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중국 정부는 1978년 개혁·개방 이후 펼친 산업정책 중에서 실패한 대표적인 분야로 자동차산업을 꼽는다. 조선 화학 등 상당수 산업은 세계 시장에서 적잖은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자동차산업만큼은 여전히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중국 자동차 업체들은 그러나 2016년부터 중국 내 시장 점유율이 급상승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 자동차들이 세계 시장을 누빌 날도 머지않았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중국의 이 같은 ‘자동차 굴기(起·우뚝 섬)’의 최선두에 있는 사람은 리수푸(李書福·55) 지리자동차 회장이다.

中 자동차 굴기 이끄는 리수푸 회장

지난달 25일 리 회장이 이끄는 지리자동차는 글로벌 자동차 업계에서 화제의 중심에 섰다. 지리자동차가 90억달러(약 9조7000억원)를 들여 독일 대표 자동차 기업 다임러의 지분 9.69%를 인수해 1대 주주로 올라선 것이다. 리 회장은 “친구들 없이 외부 침입자들에게 대항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자동차 메이커는 없다”며 “공유하고 힘을 모아 새로운 방식에 적응해야 하며, 다임러에 대한 나의 투자는 이런 비전이 반영돼 있다”고 말했다. 다임러 측도 “장기적인 자본 투자는 환영한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중국 자동차 업체가 다임러 같은 글로벌 자동차 업체의 지분을 인수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리 회장은 글로벌 자동차 기업에 대한 적극적인 인수합병(M&A)으로 회사를 키워왔다. 지리자동차는 2010년 스웨덴 볼보승용차를 인수하면서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처음으로 존재감을 알렸다. 당시만 해도 “뱀이 코끼리를 삼켰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뤘지만 리 회장은 볼보승용차에 대해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하는 한편 볼보승용차의 독자경영을 보장해줬다. 이 덕분에 볼보승용차의 실적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작년 3분기 볼보승용차의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8.4% 늘었고, 순이익도 89.3% 급증했다.

지리자동차는 작년 12월 상용차를 생산하는 볼보AB의 최대 주주로 등극했다. 유럽 헤지펀드 세이안캐피털로부터 볼보AB의 지분 8.2%를 인수하면서 지분율이 15.6%로 높아졌다. 지리자동차는 작년 5월에는 말레이시아의 국영자동차 회사 프로톤홀딩스 지분 49.9%를 인수했고, 프로톤이 보유하고 있던 영국 스포츠카 브랜드 로터스 지분 51%도 매입했다.

‘중국의 헨리 포드’를 꿈꾸다

[Global CEO & Issue focus] 글로벌 車업체 잇단 M&A…'자동차 굴기' 이끄는 '중국의 헨리 포드'
저장성 출신인 리 회장은 1984년 냉장고 부품 회사로 사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해 1990년대 중반까지 부동산 투자, 건축자재 등 다양한 분야에 손을 댔다. 어렸을 때부터 자동차를 좋아했던 리 회장은 그러나 늘 자동차 제조업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중국은 민간 자본의 자동차 제조업 진출을 허용하지 않았다. 리 회장은 1996년 지리그룹을 설립해 오토바이 제조업부터 시작했다. 회사 설립 1년 뒤 파산 직전에 있던 국유 자동차 기업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자동차 제조업에 정식으로 진출했다.

중국의 자동차 기업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성장했다. 중국 현행법에 따르면 중국 시장에 진출한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은 중국 토종 업체들과 50 대 50 합작법인을 설립해야 한다. 이 덕분에 중국 자동차 업체들은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에 ‘무임승차’하면서 별다른 노력 없이 성장해왔다.

‘중국의 헨리 포드’를 꿈꿨던 리 회장은 보통의 중국 자동차 기업 최고경영자(CEO)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합작법인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인 기술력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리 회장은 자동차 분야의 핵심 기술을 빠르게 확보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글로벌 자동차 기업 M&A라고 생각했다. 그는 2007년 미국 디트로이트쇼에 참석해 산하에 볼보를 거느리고 있는 미국의 자동차 업체 포드 자동차 부스로 찾아가 “볼보 인수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포드 측 인사들은 리 회장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정중하게 볼보를 팔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발발 이후 현금이 부족해진 포드는 볼보를 인수하고 싶어 한 중국 기업인을 기억했고, 결국 그에게 회사를 매각했다.

中 재계 대표적 ‘시진핑 인맥’

볼보승용차를 인수한 이후에도 지리자동차는 한동안 중국 자동차 시장에서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중국 내수 시장 판매 실적에서 지리자동차는 2015년까지 10위권 밖에 머물렀다. 하지만 2016년 10위에 오른 지리자동차는 지난해엔 6위로 4계단 상승했다. 10위권에 든 자동차 업체 중 성장 속도가 가장 빨랐다. 올 들어선 1~2월 판매량이 전년 동기 대비 60.3% 급증했다. 2010년 볼보승용차 인수 이후 대대적인 혁신 작업을 한 것이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적 호전으로 홍콩증시에 상장돼 있는 지리자동차 주가도 급등, 리 회장은 후룬연구소가 올초 발표한 중국 부자 순위에서 마화텅 텐센트 회장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일각에선 리 회장을 중국 재계의 대표적인 ‘시진핑(習近平) 인맥’으로 분류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저장성 공산당 서기 시절부터 친분을 맺어왔다는 이유에서다. 해외 M&A를 진행한 주요 중국 기업들이 최근 중국 정부의 집중 견제를 받는 와중에 지리자동차가 공격적인 해외 투자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시 주석의 암묵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리 회장은 볼보를 포함한 지리자동차그룹의 전체 판매 실적을 2020년까지 300만 대로 늘린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이를 통해 지리자동차그룹을 ‘글로벌 톱10’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는다는 계획이다. 하칸 사무엘손 볼보자동차 CEO는 “3년 전만 해도 지리자동차가 중국 최초의 글로벌 자동차가 될 수 있다고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며 “지금은 적절한 추측”이라고 말했다.

김동윤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