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청원 등으로 적극 목소리…'미투' '갑질 폭로' 등도 연장선
[박근혜 탄핵 1년] 시민들의 '정치적 성숙'… 불의·불공정에 침묵 없다
사건팀 = 자영업자 김모(37)씨는 1년 전까지 계속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를 "나의 정신적 성년식"으로 표현한다.

정치·사회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고 투표도 매번 '대충' 했다는 그는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진 뒤 '내가 너무 생각 없이 살아왔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인터넷 커뮤니티에 가입하고 신문을 읽으며 사회 현안에 관심을 뒀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에서 박 전 대통령이 파면된 지 1년이 지난 지금, 김씨는 정치·사회 이슈에 관한 의견을 주저 없이 밝힌다.

자영업자에게 민감한 현안인 최저임금 인상 논란이 일자 "아르바이트생도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하지 않나"라며 주변을 적극 설득하기도 했다.

사상 최대 규모 촛불집회로 현직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만든 시민들은 당시 광장에서 얻은 경험을 일상으로 끌어오고 있다.

최근 각계에 확산하는 '미투'(#Metoo) 운동, 지위를 이용한 '갑질' 행태 고발 등은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뭉쳤을 때 큰 변화를 끌어낼 수 있다는 탄핵의 교훈이 일상에서 구현된 결과라고 시민들은 말한다.

◇ 더는 침묵하지 않는 시민들…불의·불공정에 적극 의견 개진
국정농단 사태를 목격한 시민들은 권력과 밀착한 특정인이 각종 특혜를 얻고 사적 이익을 취했다는 데 크게 분노했다.

탄핵 이후 시민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불거지는 불의와 불공정에 더는 침묵하지 않는다.

평창동계올림픽 여자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을 두고 젊은 층을 중심으로 '평등한 기회의 박탈' 주장이 나오고,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 경기 팀워크 논란과 관련해 국민청원이 쏟아진 것 등이 최근 대표 사례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개인주의를 체화한 젊은이들이 그간 '나 혼자 목소리를 낸다고 뭐가 바뀌겠어'라며 자조했다면, 촛불집회로 대통령을 탄핵하고 나서는 '아, 이게 되는구나'라고 깨달은 것"이라고 진단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촛불집회에 참여한 개인들이 '우리도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정치적 효능감을 얻었다"며 "새로운 사회문제가 떠오를 때마다 사회적 가치에 공감하는 개인들이 자유롭게 연대하고 발언하는 문화가 생긴 것이 촛불집회가 남긴 긍정적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한국사회를 뒤흔드는 '미투' 열풍도 촛불집회와 탄핵 경험의 연장선에 있다는 의견이 많다.

정의와 인권에 대한 공감대가 넓어지고, 불의에 맞서 함께 목소리를 내는 문화가 확산한 결과 '미투'가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박근혜 탄핵 1년] 시민들의 '정치적 성숙'… 불의·불공정에 침묵 없다
촛불집회에 참가했다는 직장인 신모(31) 씨는 "얼마 전 회사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미투' 운동이 활발한 것도 촛불혁명으로 정권이 바뀐 것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말했다.

신씨는 "이전 정부에서처럼 권위주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을 때는 이런 식의 고발이 더 어려웠을 것"이라며 "촛불을 거치면서 권력자도 잘못했을 때 벌을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적으로 정착한 것 같다"고 해석했다.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 공동상황실장이었던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는 "'미투' 운동의 초점은 '나도 당했다'는 폭로가 아니라 '나도 말한다'는 발언권에 있다"며 "불의한 권력에 맞서고 세상을 변화시켰다는 경험이 '나도 말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넣고 있다"고 말했다.

'미투'는 유명인뿐 아니라 가족, 친지, 교사, 직장 상사 등 일상에서 마주하는 이들의 가해 사례 폭로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성폭력뿐 아니라 직장, 학교 등에서 지위를 이용해 이뤄지는 '갑질'도 수시로 폭로되는 분위기다.

퇴진행동에 참여한 안진걸 참여연대 시민위원장은 "우리 동네에서, 회사에서, 남녀 관계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이 있었는지 용기 있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야말로 촛불 시민혁명이 지펴준 용기의 불씨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가족이나 친구 등이 모인 사석에서 금기시되던 정치·사회 현안 관련 대화는 이제 일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촛불집회와 탄핵을 경험한 시민들은 민감한 이슈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을 더는 꺼리지 않는다.

직장인 최모(31)씨는 "촛불집회 이전에는 모여도 '서로 정치 얘기는 하지 말자'던 친구들이 요새는 모이기도 전에 단체 카톡방에서부터 '미투 운동' 같은 시사적인 얘기를 한다"며 뚜렷한 변화가 감지된다고 말했다.

직장인 이모(28)씨는 "사석에서 정치·종교 이야기는 안 하는 법이라 했는데 이제는 친구들끼리 술자리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당연해졌다"며 "'젊으면 진보', '기성세대는 보수'와 같은 구분도 없이 솔직히 의견을 밝힌다"고 전했다.

구정우 교수는 "이념이나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 정의가 구현되고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에 대한 공감대가 광범위하게 형성된 것 같다"며 "계층이나 성별, 연령대를 떠나 사회적 가치에 공감하는 개인들이 자유롭게 연대하고 참여한 것이 촛불집회의 특징"이라고 분석했다.

정치·사회적 신념이 일상의 소비 행위로도 이어질 만큼 시민들은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매년 주목할 만한 소비 트렌드를 제시하는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올해 트렌드 중 하나로 '미닝아웃'(Meaning Out)을 꼽았다.

미닝아웃이란 정치·사회적 신념을 소비를 통해 표현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특정 기업 제품 불매운동, 동물권 보장을 위한 채식, 페미니즘 등 정치적 지향을 나타내는 문구가 적힌 옷을 입는 행위 등이 대표적이다.

◇ "지나친 군중심리·마녀사냥 경계해야"…'방법론적 성숙' 지적도
시민들이 사회 현상이나 현안에 관해 적극 목소리를 내는 것은 민주주의 측면에서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많다.

다만 '인민재판', '마녀사냥' 등으로 무고한 피해가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방법론적 성숙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 여론에 휩쓸린 나머지 근거가 불분명한 주장만으로 특정인을 매도하거나, 주된 여론과 다른 의견을 내는 이들을 상대로 '신상털기'를 해 피해를 주는 등 사례가 심심찮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가수 고(故) 김광석 딸 사망과 관련해 김광석 부인 서해순씨에게 가해진 대중의 혐오와 비난, 지난해 한 버스 운전사와 가족에게 큰 상처를 준 '240번 버스' 사건 등은 무분별한 여론몰이가 빚은 폐단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직장인 이모(28)씨는 "어떤 문제가 불거지기만 하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이 올라오고 순식간에 여론이 조성된다"며 "일부 정제되지 않은 청원은 '인민재판'으로 흐르는 부작용도 나타나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대학생 김모(26)씨는 "정치나 시사 이야기를 전보다 많이 나누게 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온건한 토론보다는 '보수 대 진보'나 '남자 대 여자'처럼 둘로 나뉘어 싸우는 때가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곽금주 교수는 "군중심리가 지나치면 제대로 된 비판이 어려운 점을 경계해야 한다"며 "마녀사냥이나 신상털기 등이 아니라 사회 개혁과 변화를 위해 주도적으로 의견을 모으고 목소리를 내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