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방송기자 A씨(26·여)는 이전 회사에서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며 강제로 택시에 태우는 등 선배의 불쾌한 신체 접촉을 당했다. 그래도 ‘미투(#MeToo) 운동’에 동참하지는 않았다. 지난달 말 서지현 검사의 폭로 이후 미투 열풍이 불기 시작했지만 “긁어 부스럼 만들어 봤자 좋을 게 없다”며 침묵을 지켰다. 그러던 중 언론에서 한 인터뷰 기사를 보고 미투 동참을 결심했다. 자신을 택시에 욱여넣었던 바로 그 선배가 경영진 퇴진을 요구하며 ‘적폐 청산’을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정의의 사도’가 따로 없었다. A씨는 그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글을 올렸고, 가해자는 정직 6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A씨는 “뻔뻔하게 정의를 말하는 그의 위선이 더 미웠다”고 했다.
"뻔뻔한 그들 지켜볼 수 없었다"… 미투에 저격당한 권력의 위선
미투 열풍을 이끈 서 검사도 “가해자(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가 최근 종교에 귀의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는 간증 동영상을 본 뒤 참을 수 없었다”고 폭로 배경을 언급했다.

가해자들의 위선은 폭로 뒤에도 이어졌다. 2009년부터 연희단거리패에서 연극 연출을 해온 오동식 씨는 지난 21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폭로 이후 이윤택과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이 마치 우리가 어떤 나쁜 세상과 맞서 싸우는 정의감까지 드러내며 연극이 계속돼야 한다고 말했다”며 이윤택이 ‘사과 연기’를 연습한 사실을 공개했다.

위선이 일으킨 분노는 더 많은 폭로로 이어지면서 결국 가해자들의 발목을 잡았다. 21일 청주대 홈페이지에도 “피해자들이 수두룩한데도 조민기 교수 측에서 발표한 ‘전혀 사실무근이며 법적으로 강경대응하겠다’는 글을 보니 어이가 없고 너무나 화가 난다”는 추가 폭로글이 올라왔다.

미투 운동은 그간 정의, 이념, 예술 등 ‘대의’를 위한다고 말해온 중심부의 비양심을 저격한다. 고은 시인 사례도 그런 모습이다. 시인은 오랫동안 문화계 대부로 군림하면서 문단에 추종자들을 키워냈다. 성추행 폭로 뒤에도 시인의 일부 열성적 지지자들은 피해자들을 꽃뱀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제도권의 문제를 고발해온 시민단체들의 위선도 미투운동으로 드러나면서 파장은 더욱 커지는 모양새다. 지방 시민단체 운동가 B씨는 지난 14일 페이스북에 남성 활동가 C씨로부터 성추행당했다고 고백했다. 서울의 한 시민단체 상근활동가는 “시민단체 같은 조직에서는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도 외부에 흠 잡힐 일을 만들지 말자는 분위기가 팽배하다”며 “아직도 각종 시민단체 내에서 밝혀지지 않은 피해 사례가 많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문제의 본질은 ‘제 식구 감싸기 문화’라는 분석이 나온다. 가해자가 엄벌을 받지 않고, ‘셀프 조사’ 뒤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식의 징계가 이어지는 이상 비슷한 일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현장 연극인들은 자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배우와 연출, 평론가 등 연극인들은 21일 ‘성폭력 반대 연극인 행동’을 꾸렸다. 이들은 22일 발표한 입장문에서 “권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성폭력은 은밀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이뤄졌고, 심지어 ‘관행’이라는 기만적 표현으로 학습되고 묵인됐다”고 반성했다.

이어 “더 이상 성폭력 및 위계에 의한 폭력으로 고통받는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행동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피해자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가해자나 가해자를 보호하는 단체와는 활동을 함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직 나서지 못한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상담 창구를 마련하겠다는 계획과 함께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에도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성수영/마지혜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