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규 일진그룹 회장 "기술보국 신념으로 50년째 매일 전진해 왔죠"
“해방은 됐지만 기술적으로 일본의 식민지였어요. 부품소재 국산화, 기술개발을 통해 나라를 강하게 만들겠다고 생각하는 젊은이가 많았습니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이전 세대를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허진규 일진그룹 회장)

일진그룹이 오는 22일 회사 창립 50주년을 맞아 허진규 회장(78·사진)의 인생과 기업 경영사를 담은 책 《창의와 도전, 행복한 50년》을 발간했다. 책 앞부분은 창업자인 허 회장이 직접 자신의 인생과 일진그룹의 발전사를 에세이 형식으로 간략히 정리했다. 책 대부분은 허 회장의 지인들과 일진그룹 전·현직 임직원 17명이 집필했다. 주요 집필자로는 이상희 전 과학기술처 장관, 유장희 전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 이희범 2018 평창동계올림픽 및 패럴림픽대회 조직위원장, 선우중호 전 광주과학기술원(GIST) 총장, 홍순갑 전 일진전기 대표 등이다. 허 회장 처남인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책 출간을 주도했다. 김 전 총리는 허 회장 부인인 김향식 씨의 막냇동생이다.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 "기술보국 신념으로 50년째 매일 전진해 왔죠"
허 회장은 1940년 전남 부안에서 출생해 서울대 공과대(금속공학)를 졸업했다. 1968년 자본금 30만원으로 집 앞마당에 흑연 도가니를 놓고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전선과 전선을 잡아주는 커넥터 같은 수백 종류의 배전 금구류가 모두 수입품이던 시절이다. 허 회장은 순수 기술로 국산화에 매진했다. 당시로선 자본금 전부에 해당하는 투자금액을 쏟아부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함께 동복강선(강선 위에 구리를 씌운 전선)을 개발했고 국내 통신선 보급에 앞장섰다. 심리스 강관(이음새가 없는 강관), 커튼월(건축 외장재), 휴대폰 등 각종 정보기술(IT) 제품 인쇄회로기판 배터리에 들어가는 전해동박(일렉포일) 등 일진그룹이 오랜 세월 기술개발에 힘을 쏟아온 주요 제품과 얽힌 이야기가 흥미롭다. 공업용 다이아몬드를 개발한 뒤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과 벌인 소송 일화도 생생하게 기술했다.

허 회장은 1980년대 말 일본의 경제평론가 고무로 나오키가 한국의 경제구조를 ‘가마우지 경제’라고 조롱한 일화도 언급했다. 그는 “옛날 중국에서 물고기를 사냥할 때 가마우지라는 바닷새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고 이를 뺏었는데 수출을 많이 해도 원천기술이 없어 사냥한 물고기(부가가치)를 일본에 빼앗겨버리는 한국의 열악한 산업 구조를 타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허 회장은 책을 통해 끊임없는 도전과 실패를 딛고 2조원대 글로벌 부품소재 기업을 일군 그의 경영철학을 드러냈다. 40대 초반 B형 간염으로 위독한 상황까지 내몰렸다가 이겨낸 일화를 소개하며 그는 “힘들고 불안했지만 긍정적인 확신을 품고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새 삶을 얻었다”며 “사업도 기술보국(技術報國)의 신념에서 출발해 위기를 넋 놓고 바라보지 않고 매일 앞으로 전진(日進)해온 50년”이라고 강조했다.

허 회장은 “과거에는 총칼로 싸워 승리한 사람이 애국자였다면 지금은 외국과의 기술 전쟁에서 이기는 엔지니어들이 애국자”라며 “돈을 적게 벌고 싶으면 의대나 법대에 가고, 돈도 많이 벌고 세계를 주름잡는 인생을 살고 싶다면 공대에 가라”고 조언했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