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를 61일 앞둔 지난해 12월11일 오후 대전 유성구 KAIST 캠퍼스. 성화 봉송을 위해 키 2m, 몸무게 280㎏인 탑승형 로봇 ‘FX-2’가 등장하자 지켜보던 시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과학 꿈나무’ 이정재 군(14)이 올라탄 이 로봇은 왼손에 든 성화봉을 오른손으로 바꿔 쥐더니, 오준호 KAIST 기계공학과 교수가 들고 있던 성화봉으로부터 불꽃을 넘겨받았다. 올림픽 성화 봉송 역사상 로봇이 주자로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성화 봉송 주자로 나선 로봇은 ‘DRC 휴보’와 FX-2. 두 로봇 모두 오준호 교수가 이끄는 KAIST 휴보랩에서 제작했다. 휴보랩 연구실에서 만난 오 교수는 “성화 봉송은 올림픽을 앞두고 분위기를 띄우는 목적이 있는데, 로봇이 나와 이슈가 되고 외신에도 가장 많이 소개돼 뿌듯하다”고 말했다. 또 “탑승형 로봇 FX-2를 통해 ‘사람과 공존하는 로봇’의 원형을 보여줄 수 있어 뜻깊었다”고 했다.

“올림픽, 로봇 기술 뽐내는 무대”

[人사이드 人터뷰] "평창올림픽 '도우미 로봇' 총지휘… 사람과 로봇의 하모니 기대하세요"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 봉송팀에서 오 교수에게 로봇을 주자로 내세우고 싶다고 연락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년 반 전. 세계 재난 로봇 대회에서 우승한 전력이 있는 DRC 휴보는 이미 완성됐지만, FX-2는 성화 봉송을 계기로 새로 제작했다고 한다.

“탑승형 로봇 FX-1이 이미 있었습니다. 2005년에 개발해 한 번 공개하고 10년 넘게 창고에 묵혀 놓았던 로봇이에요. 성화 봉송에 로봇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고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 요즘 거대 로봇이 이슈다 보니 거대 로봇의 원형이랄 수 있는 FX-1이 생각난 거죠.”

오 교수팀은 FX-1의 골격을 토대로 상체를 완전히 새로 디자인하고, FX-1에는 없는 양팔을 붙였다. 그는 “자동차는 엔진이 꺼지면 그대로 서 있지만 이족보행(二足步行) 로봇은 의식을 잃으면 쓰러진다”며 “사람이 타는 로봇은 훨씬 더 안전성이 강조된다”고 했다. 특히 올림픽 성화 봉송은 전 세계 사람들이 지켜보는 행사인 만큼 사람이 탄 채 쓰러져 다치기라도 하면 평창 올림픽 전체에 찬물을 끼얹는 중대한 사건이 될 수 있다. 오 교수는 “제대로 못 하면 망신만 당한다는 생각으로 완벽을 기했다”고 했다.

오 교수는 성화 봉송과는 별개로 평창 동계올림픽 로봇지원단 총감독도 맡고 있다. 공항과 경기장, 프레스센터에서 홍보·안내를 하고, 경기장과 선수촌에 배치돼 보안·경비 업무를 지원하는 로봇 등을 총괄 지휘·감독하는 자리다. 올림픽 기간에는 국내 대학·연구기관·기업체 등이 로봇으로 기량을 겨루는 ‘로봇 스키 대회’도 열린다. 그는 “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한국이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이니 이를 강조하기 위해 한국 중소기업이 만든 로봇을 배치하려 했다”며 “조직위가 전문적인 지식이 없으니 내게 도움을 청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 로봇 분야 공식 스폰서로 일본 도요타가 정해져 삼성전자, LG전자 같은 국내 대기업은 로봇을 출품할 수 없다. 국내 중소 로봇업체들은 홍보를 위해 앞다퉈 자신의 제품을 공급하고 싶어하는데, 아무 로봇이나 받아줄 수 없어 오 교수가 총감독으로 로봇을 선별한 것이다.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첫 번째는 완성도. 잘못 작동해 나라 망신시키지 말라는 거죠. 두 번째는 뻔한 로봇은 안 되고 참신한 부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 세 번째는 사람들에게 진짜 도움이 되는 기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고 한다. 지난해 3월 정부 차원에서 논의가 시작돼 실제로 예산이 편성되고 업체가 선정된 것이 8월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로봇을 기대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아쉬운 부분이죠. 일본은 2020년 도쿄올림픽에 맞춰 수조원을 투자해 로봇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어요. 사회 모든 분야에 로봇이 적용된 모습을 일본을 찾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겁니다. 올림픽은 자국의 기술력을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인데, 우리도 조금만 더 일찍 준비했다면 좋았을 거예요.”

로봇 부품 기반 약한 한국

지난해 12월11일 대전에서 오준호 KAIST 교수(왼쪽)가 탑승형 로봇(FX-2)에게 성화를 인계하고 있다. 한경DB
지난해 12월11일 대전에서 오준호 KAIST 교수(왼쪽)가 탑승형 로봇(FX-2)에게 성화를 인계하고 있다. 한경DB
오 교수는 2004년 12월 국내 최초로 두 발로 걷는 인간형 로봇 ‘휴보’를 제작했다. 2000년 일본 혼다가 개발한 이족보행 로봇 ‘아시모’가 자극이 됐다. 처음엔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일본 혼다가 15년 동안 3000억원을 투입해 아시모를 제작했는데, 로봇 기반이 없는 한국이 어떻게 인간형 로봇을 만들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 교수는 자신이 있었다. 뚝심이 있었다. 2001년 1월 개발을 시작해 이듬해 8월 인간형 로봇 형태의 ‘KHR-1’ 몸체를 만들었다. 2003년 1월에는 KHR-1이 걷는 데 성공했다. 키 120㎝, 몸무게 48㎏에 21개 관절을 갖고 있었다. 개발비는 4000만원밖에 들지 않았다. 대신 오 교수는 주말도 없이 일하고 새벽 1~2시에 퇴근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렇게 2003년 8월 ‘KHR-2’, 2004년 12월 휴보(KHR-3)가 차례로 탄생했다. 휴보가 나오기까지 들인 돈은 총 10억원, 기간은 3년에 불과했다. ‘대덕의 기적’이란 말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2008년 개발된 ‘휴보2(KHR-4)’는 더 빨라졌고 가벼워졌다. 2011년 나온 ‘휴보2 플러스’는 첫 상용화 제품으로 세계적으로 15~20대가 팔렸다. 무거운 물체도 들 만큼 힘을 키운 ‘DRC 휴보’는 2015년 미국 국방부 산하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연 ‘DARPA 로봇공학 챌린지(DRC)’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세계 최고의 재난 수습 로봇으로 꼽힌 것이다.

그런 만큼 한국의 로봇 기술이 세계 정상급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 교수는 “냉소적으로 보면 한국의 로봇 기술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로봇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부품과 소재를 거의 일본 등 선진국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서비스 로봇은 한국이 크게 뒤처지지 않았습니다. 정부도 관심을 두고 있고, 기업도 많이 뛰어들었죠. 하지만 그 로봇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센서, 감속기, 모터, 제어기 등은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해서 씁니다. 한국이 못 만드는 건 아닌데 완성도나 브랜드 파워에서 밀리는 거예요.”

그래서 휴보랩에선 지금 로봇용 모터, 구동기, 감속기 등을 직접 제작하는 일이 한창이다. 그는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라며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휴보랩에서 연구한 부품 기술이 훗날 한국 로봇산업을 지탱하는 힘이 될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인간형 로봇 보편화는 시간 더 걸려”

[人사이드 人터뷰] "평창올림픽 '도우미 로봇' 총지휘… 사람과 로봇의 하모니 기대하세요"
오 교수는 어릴 때부터 기계광이었다. 서너 살 때 할머니 재봉틀이나 째깍째깍 움직이는 시계에 매료됐다. 초등학교 때 문방구에서 파는 종이 화약을 사용해 3단 로켓을 만들었고, 중학교에 들어가선 전자공학에 빠져 회로 부품을 사러 서울 청계천으로 ‘출퇴근’하다시피 했다. 어느 날은 증기기관차를 만들려 철공소에 가서 쇠를 깎았다. 렌즈를 구입해 직접 천체망원경을 만든 뒤 목성을 관찰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는 반 전체 64명 중 58등을 했다. 여러 과목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스스로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2학년 올라가 미적분을 배웠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수학의 정석’을 2주 만에 다 뗐습니다. 과학자가 돼야겠다는 목표로 국사 사회 윤리 영어 같은 공부도 하게 됐어요.”

고3이 되자 성적이 최상위권에 올랐다. 그는 연세대 기계공학과로 진학해 석사과정까지 밟은 뒤 미국 UC버클리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원자력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1985년 KAIST 교수가 됐다.

20년 넘게 인간형 로봇 개발에 매달려 온 오 교수지만 “인간형 로봇이 인간 생활에 들어오려면 한참 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인간형 로봇을 연구하며 얻은 기술은 널리 쓰이겠지만 청소로봇, 빨래로봇 등 전문로봇이 먼저 보편화한 뒤 먼 훗날 인간형 로봇이 보급될 것이란 설명이다. “지금 로봇에게 탁자 위 물체를 잡으라고 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잡을 것을, 로봇은 손바닥을 옆으로 해서 잡을지, 아래로 해서 잡을지 혹은 팔을 뻗어서 잡을지, 허리를 숙여서 잡을지 고민해야 하죠.” 오 교수는 또 “로봇이나 인공지능(AI)이 언젠가 인간을 넘어서고 대체할 것이란 ‘특이점 이론’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오 교수는 2년 뒤면 정년 퇴임한다. 퇴임 후 그는 휴보 사업화를 위해 2011년 세운 회사 레인보우로 자리를 옮겨 로봇 개발을 계속하지만 KAIST 내 연구실인 휴보랩은 떠나야 한다. “지금 휴보랩을 맡아줄 후임 교수를 찾고 있습니다. 휴보랩은 이제 세계적인 브랜드가 됐어요. 10~20년 뒤에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로봇 연구실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세계 최고 성능 자랑한 '휴보'
"재난대회 우승 '휴보' 업그레이드 중… 조만간 현장 투입"


2011년 3월11일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자력발전소에 높이 10m가 넘는 쓰나미(지진 해일)가 덮쳐 모든 전기가 끊겼다. 냉각수 공급이 멈추자 노심 온도는 섭씨 1200도까지 올랐고, 방호벽이 녹으면서 방사성 물질이 유출되기 시작했다.

이런 극한 재난 상황에서 작동하는 로봇을 제작하자는 목표로 2012년부터 2015년까지 3년에 걸쳐 미 국방부 산하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주최한 ‘DARPA 로봇공학 챌린지(DRC)’가 열렸다. 여기에 출전한 로봇은 1시간 안에 △자동차 운전 △자동차 하차 △문 열기 △밸브 잠그기 △벽 뚫기 △돌발 과제 해결 △장애물 돌파 △계단 오르기 등 8가지 임무를 마쳐야 한다.

2015년 최종 결승전에서 44분28초 만에 8가지 임무를 모두 완수하고 우승을 차지한 로봇이 바로 KAIST의 인간형 로봇 ‘DRC 휴보’(사진)다. 2위 미국 플로리다대 인간기계연구소(IHMC)의 ‘러닝맨’, 3위 미국 카네기멜론대의 ‘타르탄 레스큐’를 제치고 우승해 상금 200만달러(약 21억원)를 받았다.

대회가 끝난 뒤 미국 국방 관련 국책 연구소가 DRC 휴보 4대를 특별 주문해 구입하기도 했다. DRC 휴보는 대당 가격이 수억원에 이르는데, 그만큼 휴보의 성능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인정한 것이다.

‘휴보의 아버지’인 오준호 KAIST 기계공학과 교수는 “시스템을 개선해 사용자가 더 편리하고 쉽게 휴보를 조종할 수 있도록 하고, 힘과 속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DRC 휴보를 계속 발전시켜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재난 수습 로봇의 현장 투입도 머지않았다고 전망했다. 오 교수는 “사람과 달리 로봇은 한 종류만으로 화재, 홍수, 지진, 방사능 유출 등 모든 재난을 다룰 순 없지만 특정 재난 맞춤형 로봇은 인명 구조 및 재난 구역 탐사 등에 곧 쓰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