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 싸움' 심해지는 의사·한의사
지난달 29일 이기일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관과 김록권 대한의사협회 부회장, 이승혁 대한한의사협회 부회장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 등을 논의하기 위한 의료현안 협의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이날 의사협회 측은 한약 안전성과 유효성 검증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합을 위한 자리에서 한약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 셈이다. 의사·한의사 간 극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지만 서로 견해차만 확인한 채 끝났다. 추후 회의에서도 이들이 의견을 하나로 모아 손을 맞잡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의사와 한의사는 의료기기 사용 문제 외에 한약 건강보험 적용을 두고도 첨예한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말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인 양승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65세 이상 노인이 한약을 지어 복용할 때 건강보험 혜택을 주는 내용의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한의사들은 환영했지만 의사들은 반대했다. 한 의사단체는 해당 법안이 통과되면 충남지사 선거 후보로 거론되는 양 의원의 낙선운동을 하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첨예한 갈등의 배경에는 ‘진료 주도권을 뺏겨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있다. 한의사가 현대 의료기기를 쓰면 한의과 진료 효과를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게 된다. 의사들이 독점하는 건강검진 등으로 한의사들의 영역이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한약에 건강보험 혜택을 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국민건강보험을 단일 보험자로 삼는 국내 의료시스템에서는 모든 의료기관이 하나의 건강보험과 계약을 맺어야 한다.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 등 직종이나 동네의원 중소병원 대형병원 등 규모에 관계없이 모든 의료기관이 건강보험 재정이라는 정해진 파이를 나눠 먹는 구조다. 누군가의 영역이 커지면 다른 영역은 작아질 수밖에 없다. 직역 간 갈등이 커지는 이유다.

의사단체와 한의사단체의 내부 정치싸움도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한의사협회는 2일까지 회장 선거를 치른다. 세 명의 회장 후보가 치열한 선거운동을 펼치고 있다. 3일 새 집행부가 구성되면 내부 결속을 위해 한의사들의 이익을 좇는 행보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의사협회도 오는 3월 회장 선거를 앞두고 있다. 주요 선거 주자는 벌써 한의사 의료기기 허용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내 영역을 뺏길 수 없다’는 직역 이기주의와 회장 선거를 앞둔 정치셈법이 맞물린 셈이다.

서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집한다면 간극을 좁히는 일은 요원할 것이다. 2018년 새해가 밝았다. 묵은 짐을 버리고 새 희망을 꿈꾸는 시기다. 의사와 한의사가 낡은 갈등의 틀을 버리고 한 발씩 물러서 화합의 시대를 여는 해가 되길 기대해본다.

이지현 바이오헬스부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