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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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신아.” “왜, 이 ×신아.” 학교 복도를 지나가다 농으로 주고받은 사소한 다툼은 예상치 못하게 커졌다. 경기도 한 고교에서 일어난 사례다. 당시만 해도 웃고 넘겼던 A군은 이후 사이가 틀어지자 상대 B군을 상대로 ‘언어폭력’에 대한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를 열어 달라며 신고했다.

담임교사는 “별일 아니니 서로 사과하고 없던 일로 하면 안 되겠느냐”는 취지의 말을 했다가 학폭 은폐·축소 시도로 몰릴 뻔했다. 어쩔 수 없이 학폭위를 연 이 교사는 “남학생끼리 늘 하는 말인데 싸잡아 문제 삼으면 학폭이 된다”며 “신고가 들어오면 무조건 학폭위를 열어야 해 문제 해결은커녕 감정의 골만 깊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꿀밤 한 대, 욕설 한마디에도 “법대로”

욕설 한마디에 "법대로 해"… 학폭위 피로증
학교의 ‘학폭위 피로증’이 심각한 수준에 접어들었다. 송기석 국민의당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학폭위 심의 건수는 2013학년도 1만7749건에서 해마다 늘어 2016학년도 2만2673건으로 3년 새 27.7% 증가했다. 현장 체감은 더 심각하다. 올해 굵직한 사건이 연달아 터진 탓이다. 대기업 회장 손자가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은 숭의초 학폭 사건, 부산 여중생 폭행 사건을 기점으로 학폭위 신고는 걷잡을 수 없이 폭증했다.

학생 간 꿀밤 한 대, 욕설 한마디까지 모두 학폭으로 간주해 ‘법대로’ 처리하자는 추세다. 실제로 서울의 한 중학교 학생은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서 “쟤 재수 없어”라고 ‘뒷담화’했다가 신고로 학폭위에 회부됐다. 카카오톡 메시지는 그대로 ‘증거’가 됐다.

일반적 법 적용보다 훨씬 과잉 규정하는 학폭법이 문제를 키웠다. 예컨대 사회에서는 경미한 쌍방 과실은 당사자 간에 합의하거나 경찰이 합의를 권하기도 한다. 그러나 학폭법에서는 불가능하다. 영남 소재 한 중학교 교사는 “학생들끼리 순간 욱해서 다퉜다가 화해했고 학폭위 신고를 하지 않았더라도 교사가 상황을 인지하면 학폭위를 열어야 한다”고 했다.

◆학폭 전담변호사까지 등장

일단 학폭위가 열리면 1호(서면사과)부터 9호(퇴학)까지의 조치 사항을 학교생활기록부에 의무 기재하도록 돼 있다. 서울 지역 고교 진학부장은 “한마디로 ‘전과’ 기록이다. 실정법을 어겨도 기소유예되면 기록은 남지 않는 걸 감안하면 과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수험생 인성을 평가하는 대입 학생부종합전형 준비 학생에게는 치명타다. 학폭 전문 법무법인 관계자는 “학생부 기재는 예민한 사안이라 소송까지 가는 경우가 꽤 많다”고 전했다.

학교의 행정 부담도 크다. 신고가 들어오면 진술서부터 조사·보고·조치 절차까지 작성해야 하는 서류만 평균 10종이다. 김재철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대변인은 “심한 경우엔 30~40가지 서류를 준비한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 등지에서는 변호사까지 구해 학폭위를 대비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경미한 사안은 학폭위를 열지 않고 학교 내에서 ‘교육적 해결’에 힘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 교육계 인사는 “예컨대 부산 여중생 폭행 사건은 학폭위가 아니라 소년법정에서 다룰 사안”이라고 꼬집었다. 학폭위가 결코 능사도 만능도 아니며, 지나치게 광범위한 학폭법 개정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주장이다. 교총은 ‘학교장 종결제’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조건 학폭위로 몰고 가 징계와 처벌로 결론내지 말고 지도·훈계 등 적절한 생활지도를 선행하자는 주장이다.

김봉구 기자 kbk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