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외국어대 92학번 김모씨(44)는 이른바 ‘IMF(국제통화기금) 세대’다. 외환위기가 터지고 나서 곧바로 대학을 졸업해 사상 최악의 취업난에 내몰렸다. 그는 운 좋게도 이듬해 한 중소기업에 입사했다. 첫 직장의 설렘은 산산이 깨졌다. 회사는 “사정이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했고 월급 지급을 차일피일 미뤘다. 결국 입사 4개월 만에 부도가 났다. 한 번도 받지 못한 급여는 다행히 정부에서 대신 챙겨줬다. 김씨의 이직 인생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첫 번째 옮긴 회사에서 제때 월급이 나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반가울 정도였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한복판에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뎌야 했던 대졸 취업준비생에게 1998~1999년은 혹독한 시기였다. 대학 졸업장만 쥐면 기업이 앞다퉈 ‘모셔갔다’던 선배들 얘기는 이들에겐 무용담과도 같았다. 어렵사리 합격했다가 불과 하루 만에 청천벽력 같은 취소 통보를 받거나 입사 후에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제때 사회에 첫발을 내딛지 못한 이들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상당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입사 취소 후 소송 내기도

1991~1994년 대학에 입학한 이들은 ‘저주받은 학번’으로 불렸다. 1997년 말 터진 외환위기는 대졸 공채의 판도를 확 바꿔놨다. 졸업할 때가 됐지만 선배들의 조언은 통하지 않았다. 기업의 신규 채용은 급격히 얼어붙었다. 무엇보다 상대적 박탈감이 컸다. ‘하필 왜 지금이냐’는 원망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인하대 92학번 전모씨(45)는 대학 3학년 때 한국타이어 장학생으로 선발됐으나 1997년 말 입사 취소 통보를 받았다. 전씨는 “그전에만 해도 대기업이 인재를 데려오기 위해 졸업 전부터 ‘입도선매’하는 경우가 흔했다”며 “아무런 준비 없이 입사 취소 통보를 받으니 눈앞이 캄캄했다”고 회상했다.

전씨 같은 사례는 비일비재했다. ‘현대전자 사태’가 대표적이다. 현대전자는 1997년 말 공채에서 200여 명을 뽑았으나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자 1999년 6월 합격을 취소했다. 입사가 취소된 이들은 “채용 내정자도 종업원”이라며 소송에 들어갔지만 끝내 패소했다.

고려대 91학번 김모씨(45)도 비슷한 풍경을 기억한다. 그는 “87~89학번 세대는 취업에 대한 고민 없이 회사를 골라갔다”며 “반면 91학번 동기들은 취업이 안 돼 대부분 졸업을 미루거나 대학원에 진학했다”고 전했다. 김씨의 학부 동기 80명 중 10%인 7~8명이 취업 대신 대학원을 택했다. 이 때문에 ‘졸업 유예’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기도 했다.

‘공무원이 최고’ 인식 확산

망하지 않을 것 같던 대기업, 은행 등이 잇따라 무너지면서 ‘공무원이 최고’라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정부도 실업 해소를 위해 공무원 채용을 늘렸다. 1999년 국가공무원 채용 인원은 1만2790명으로 전년(1만1349명)보다 12.7% 늘었다. 특히 7급 공채는 250명에서 475명으로 급증했고, 9급 공채 역시 1096명에서 1335명으로 늘었다. 순천대 90학번 양모씨(47)는 1998년 말 9급 순경 시험에 합격했다. 그해 학원 밀집 지역인 서울 노량진은 밀려드는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고교 졸업생이 주로 응시한다는 인식이 강했던 9급 공무원 시험에도 대졸자가 대거 몰렸다. 양씨는 “경찰학교에서 만난 동기 중에는 대위 전역자나 서울 주요 대학 졸업생도 꽤 많았다”고 했다.

1998년 졸업한 건국대 94학번 고모씨(43)도 번번이 취업에 실패했다가 2004년에야 9급 공무원으로 입직했다. 고씨는 “예전엔 ‘그 정도 학벌이면 왜 여길 오냐’는 말도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다”며 “공무원 선호 현상도 결국 외환위기의 유산”이라고 말했다.

이현진 기자 ap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