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효력을 잃고도 법조문 내 방치된 ‘죽은 법’이 62건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정부 부처와 국회의 무관심으로 오랜 시간 방치되거나 발이 묶인 법률 조항들이다. 법적 안정성과 완결성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정비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약사법·집시법 등 위헌 법령 62건 '나 몰라라'
◆국보법·약사법 등 대표적 죽은 법

1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윤상직 자유한국당 의원이 공개한 ‘부처별 미개정 위헌법령 현황’에 따르면 총 62건의 부처 소관 법률조항이 위헌 또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고도 개정되지 않은 상태다.

헌재가 위헌 또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 해당 법률조항은 효력을 잃는다. 헌재는 즉시 법률 효력을 상실시키거나 특정 개정 기한을 부여한다. 소관 부처는 해당 법률조항을 삭제하거나 다른 조항으로 대체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부처에서 개정안을 내놓지 못하거나 내놓더라도 국회에 계류되면서 죽은 법이 여전히 곳곳에 남아 있다.

가장 오래 죽어 있는 법은 국가보안법 제19조다. 1992년 4월 위헌 결정이 난 후 무려 25년간 살아남았다. 이 조항은 국보법 제7조(찬양·고무 등) 및 제10조(불고지)와 관련해 수사를 받는 피의자의 구속 기간을 최대 50일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다. 헌재는 무죄추정 원칙에 반한다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관계 부처인 법무부는 아직 개정 검토 중이다. 이미 죽었더라도 국보법 개정 자체가 예민해서다. 실제 적용 사례가 거의 없다는 이유도 있다.

2002년 9월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옛 약사법 제16조 1항은 헌재가 따로 개정 기한을 정하지 않아 여전히 효력을 발휘 중이다. 헌재는 법인을 구성해 약국을 개설하려는 약사들의 직업의 자유 등을 침해한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해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 옥외집회를 금지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제10조도 이미 죽은 법이다. 2009년 9월 헌재의 위헌 결정을 받았지만 해당 법조항은 남아 있다.

◆관계 부처와 국회 무관심이 원인

죽은 법이 곳곳에 남아 있는 원인은 관계 부처와 입법기관인 국회의 무관심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미개정 법률 62건 중 국회에 계류 중인 법률은 57건이다. 국보법 등 발의조차 되지 않은 법이 5건이다.

부처별 현황을 살펴보면 여성가족부가 23건으로 미정비 법률이 가장 많다. 대부분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조항으로 지난해 4월 대거 위헌 결정을 받았다. 법무와 경찰건이 8건으로 뒤를 이었다. 중앙선관위(6건), 보건복지부(5건), 농림축산식품부(4건), 국방부(3건), 고용노동부·교육부(2건), 중소벤처기업부 (1건) 순이다.

특히 법무부는 국보법, 변호사시험법, 인신보호법, 민법 등 미개정 법률의 종류가 가장 다양하다. 복지부 소관인 의료법이나 약사법은 이미 효력을 잃었지만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이해관계 대립이나 사회적 논의가 이뤄지지 못해 국회 내 개정법 통과 자체가 뒷전으로 밀려난 법들이 다수다.

국회의 ‘직무유기’로 볼 여지가 있는 부분도 있다. 국보법 19조와 약사법은 20대 국회가 개원한 지 1년이 넘었는데도 관련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지 않고 있다. 이외에 국보법 13조와 통신비밀보호법 6조 7항, 성폭력범죄자 약물치료법 8조 1항 등도 개정안이 제출되지 않았다.

윤 의원은 “위헌 결정 후 20년 넘게 정비가 안 됐다는 것은 정부가 잘못된 법률조항을 바로잡고자 하는 개정 의지가 없다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며 “위헌 또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법률조항을 조속히 정비해야 한다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윤상 기자 k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