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한 고위 법관들이 전관예우 대신 대학 강단에 서서 후학 양성에 나서는 사례가 늘고 있다. 올 들어서만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선고한 이정미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을 비롯해 박병대 전 대법관, 박한철 전 헌재소장 등이 잇따라 대학교수로 ‘제2의 삶’을 시작했다.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제도 안착으로 실무전문가 수요가 늘어난 데다 고위 법관의 전관예우에 엄격해지는 법조계 풍토가 맞물린 결과로 풀이된다.

◆박한철 이정미…개업 대신 대학行

'전관예우' 대신 대학으로 간 전 고위 법관들
서울대는 16일 박 전 헌재소장을 올 9월부터 1년간 서울대 법과대학 초빙교수로 임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박 전 소장은 무보수 명예직인 만큼 급여를 받지 않는다. 강의나 대학원생 지도를 담당하는 경우 시간강사에 준하는 보수(시간당 7만~8만원)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한 학기에 한두 차례 특강 외에 정규 강의를 맡을 계획은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재민 서울대 교무부학장은 “(박 전 소장은) 강의보다는 전문 분야인 헌법 관련 개인 연구활동을 비롯해 교수들과의 공동 연구에 전념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신 개인 연구실과 컴퓨터 등 각종 기자재를 지원받을 수 있다.

'전관예우' 대신 대학으로 간 전 고위 법관들
이 전 권한대행도 퇴직 직후인 올 3월 모교인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초빙석좌교수로 임용됐다. 그는 정규 수업을 맡아 직접 강의하고 수천만원의 급여도 받는다. 2학기에는 로스쿨 재학생을 대상으로 ‘법과재판실무’라는 전공 과목을 개설했다. 강의는 1주일에 한 번, 한 시간 동안 한다. 수강신청이 진행 중인 이날 현재 28명의 학생이 등록을 마쳤다. 지난 6월 퇴임한 박병대 전 대법관 역시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초빙석좌교수로 임명됐다. 사법연수원 교수로 임용 예정인 이상훈 전 대법관을 포함해 올해 퇴직한 고위법관(헌법재판관 대법관) 네 명 중 세 명이 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된 셈이다.

대학에 둥지를 튼 건 청렴성으로 이름을 날린 조무제 전 대법관이 시초다. 그는 2004년 퇴임 후 동아대 석좌교수로 부임해 지금껏 강단에 서고 있다.

◆‘로펌행 3년 금지’…‘임시 도피’ 성격도

10여 년 전만 해도 대학행(行)은 보기 드물었다. 퇴직 후 다른 고위 공직으로 옮기거나 변호사 사무실을 여는 게 일반적이었다. 수십억원의 연봉을 받고 대형 로펌에 영입되는 일도 흔했다.

분위기가 반전된 것은 2011년 ‘고위공직자윤리법’이 개정되면서다. 1급 이상 고위직은 퇴직 전 근무한 기관의 업무 중 민간기업 이해관계에 영향을 주는 업무를 퇴직 후 1년간 맡을 수 없도록 했다. 비슷한 시기에 변호사법도 개정돼 대법관 출신 변호사는 1년간 상고심 사건을 수임할 수 없게 됐다.

이때부터 대학행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교수직이 잠시 숨을 고르는 ‘임시 도피처’로 악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그래서 나온다. 2014년 퇴임한 차한성 전 대법관은 1년간 영남대 석좌교수를 지낸 후 태평양으로 이직했다. 신영철 전 대법관도 정확히 1년간 단국대 석좌교수로 활동한 뒤 광장에서 근무 중이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마련된 ‘관피아 방지법(고위공직자윤리법 개정안)’에 따라 2015년 3월부터 대법관 이상 고위 법관의 로펌 취업 제한기간이 1년에서 3년으로 늘면서 대학 인기가 더 높아졌다. 한 사립대 로스쿨 관계자는 “장관 등 고위 공직 후보가 된 뒤 전관예우 논란으로 낙마해 명예가 실추되는 사례가 많았던 만큼 앞으로도 대학행은 더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같은 추세는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대법관·헌법재판관·법무부 장관·검찰총장 출신은 2년간 변호사 등록 자체를 제한하는 강력한 법을 대한변호사협회가 준비 중이어서다.

황정환/구은서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