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방·조롱…저급한 글 난무하는 '법관 게시판'
“이런 사람들이 같은 판사라니. 심란해서 게시판을 더 읽지도 못하겠네요.”(서울 소재 법원 한 부장판사)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등으로 내홍을 겪는 사법부의 익명게시판이 저급한 비난과 조롱으로 도배되고 있다. 소위 진보판사들 목소리가 거칠어지며 ‘사법부 파동’으로 비화될 조짐이다.

25일 법조계에 따르면 지난 19일 대표판사 100명이 모인 ‘전국법관대표회의’ 이후 법원 내부망 ‘코트넷’의 익명게시판에는 하루 수십 개씩의 글이 올라오며 내전을 방불케 하고 있다. 판사들의 건강한 의식 교류가 이뤄질 것이란 기대와 달리 양분된 판사들이 도를 넘는 인신공격성 발언을 쏟아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의견이 다른 판사의 실명을 거론하며 직설적으로 공격하고 있어 감정 싸움이 증폭되는 양상이다.

법원 내부망은 2000년에 개설됐고, 익명게시판은 지난달 처음 생겼다. 기존 게시판이 실명으로 운영돼 의견 개진이 부자유스럽다는 주장에 따라 전국법관대표회의에 앞서 만들어졌다. 현직 판사만 글 게시와 열람이 가능하다.

양승태 대법원장
양승태 대법원장
지난 19일 회의 당시 ‘거수기가 되기 싫다’며 진행 방식에 반발한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에 대한 공격이 특히 일방적이다. 한 게시글은 “어찌 ‘만연히’ 그렇게 오셔서 준비 부족을 자인하는 말씀을 당당히 하시는 것인지. 까마득한 후배로서 안쓰럽다”고 비아냥댔다. 이번 사태를 촉발한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55·사법연수원 18기·고법 부장판사)을 향해서도 “한가하실 텐데 내 밑에서 재판연구원이나 하시라”는 조롱조의 공격이 이어졌다.

대법원장도 거친 공격을 피해 가지 못했다. 지난 22일 오전 처음 양승태 대법원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글이 올라온 것을 시작으로 ‘양승태 씨’라고 직함을 떼고 지칭한 게시글도 등장했다. 이처럼 상황이 악화되자 김창보 법원행정처 차장이 “민형사상 문제가 될 수 있는 글을 자제하라”고 게시판에 공개 경고까지 하고 나섰다.

보수적인 법원 분위기상 판사들은 오프라인에서도 자기 생각이나 의견을 잘 밝히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런 만큼 익명게시판에 쏟아지는 거친 발언들에 법원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한 판사는 “글의 수준이나 강도를 볼 때 내가 아는 동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라며 “법원의 ‘민낯’이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럽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한 단독재판 판사는 “이런 행태는 우리가 유죄 선고를 내리는 ‘키보드 워리어’랑 다를 바가 무엇이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지방 소재 법원의 한 부장판사도 “품위 있는 토론을 기대했는데 정말 개탄스럽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위원장 전효숙)가 이번 사태에 대한 기존 진상조사 결과를 검증하기 위해 26일 소집된다. 윤리위 결론이 이번 사법부 파동의 전개 방향을 좌우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부장판사를 지낸 한 법조계 관계자는 “윤리위가 조사위 결론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거나 이 전 상임위원보다 ‘윗선’의 책임 등을 거론할 경우 양 대법원장 입지가 더욱 좁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상엽 기자 l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