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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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금 조성, 뇌물수수, 조세포탈, 범죄 수익금 은닉, 자금세탁 같은 범죄에서는 다른 사람 명의로 금융거래를 하는 불법 차명거래가 이용된다. 금융실명제는 불법 차명거래를 막아 투명한 금융거래를 확보함으로써 범죄행위 자체를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오는 제도다. 1993년 8월부터는 실명 금융거래가 의무화돼 예금과 같은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심영 연세대 로스쿨 교수
심영 연세대 로스쿨 교수
금융실명제가 도입됐음에도 세금 우대를 받기 위해 다른 사람 명의로 예금하는 경우와 같이 자신의 실명을 감추고 다른 사람 이름으로 예금하는 사례가 많다. 이렇게 다른 사람 명의로 은행에 예금하면 그 예금에 대한 권리자, 즉 예금주가 누구인지가 문제된다. 이에 대한 답을 준 것이 대법원이 2009년 선고한 ‘2008다45828 전원합의체 판결’이다.

이 사건의 사실관계를 들여다보자. X저축은행에는 원고 명의로 4200만원, 원고의 남편(A) 명의로 4900만원이 예금됐다. 원고 명의의 예금거래신청서 신청인란에는 원고 성명과 주민등록번호가 기재돼 있고 원고의 주민등록증 사본이 붙어 있다. 실명확인란에는 담당자와 책임자의 확인 도장이 찍혀 있다. 통장도 원고 명의다.

실제 예금주는 누구?

[대한민국을 흔든 판결들] "실명확인한 계좌는 명의자 소유" 판결…과세회피 목적일땐 처벌
그러나 원고 명의의 예금거래신청서는 남편 A가 작성했다. 거래 인감으로 A의 도장이 쓰였고, 비밀번호도 A의 정기예금에 사용하는 비밀번호와 같았다. 예금계좌의 이자는 A 명의 Y은행 계좌로 자동이체됐다. 무엇보다 원고 명의로 예금한 4200만원은 예금한 당일 A 명의의 다른 금융회사에서 인출한 돈이었다.

이후 X저축은행이 부실화해 예금을 지급할 수 없었고 예금자보호법에 따라 예금보험공사가 보험금을 지급하게 됐다. 예금자보호법은 하나의 금융회사를 기준으로 예금자 1인당 5000만원을 한도로 보험금을 지급한다. 예금보험공사는 원고 명의의 예금을 A의 예금으로 보고 A에게만 예금보험 한도인 5000만원을 지급했다. 원고는 남편으로부터 증여받은 돈을 예금한 것으로 자신이 예금주이기 때문에 예금보험공사는 자신에게 보험금으로 예금액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피고인 예금보험공사는 예금주 명의가 원고로 돼 있기는 하지만 A가 예금자보호법이 정한 보호 한도를 회피할 목적으로 원고의 명의를 빌려 계좌를 개설한 것에 불과하므로 실제 예금주인 A에게 보험금을 모두(한도인 5000만원까지) 지급했다고 주장했다.

차명계좌 인정하지 않은 1·2심

제1심 법원과 제2심 법원에서는 원고 명의 예금은 A가 예금자보호법상 보호를 받기 위해 원고 명의로 개설·관리해오던 것으로 예금 출연자인 A와 X저축은행 사이에서는 예금 명의자인 원고가 아니라 A를 예금주로 하는 묵시적 약정이 있었다고 판단, 예금보험공사의 주장이 옳다고 했다. 제1심과 제2심 법원의 결론은 그때까지의 대법원 판결에 따라 판단한 것이었다.

대법원은 전원합의체 판결을 하기 전에는 금융실명제도에 따라 원칙적으로 예금 명의자를 예금주로 봤지만 출연자와 금융회사 사이에 명시적 또는 묵시적 약정이 있으면 예금 명의자가 아니라 출연자를 예금주로 봤다. 그리고 예외를 인정해 출연자를 예금주로 판단하는 사례가 점차 증가했다. 이런 판례의 태도는 금융실명제 취지를 점차적으로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대법원 “명의 차용 엄격히 판단해야”

그러나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기존 판례를 변경했다. 대법원은 “본인인 예금 명의자의 의사에 따라 예금 명의자의 실명확인 절차가 이뤄지고 예금 명의자를 예금주로 해 예금계약서를 작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예금 명의자가 아니라 출연자 등을 예금 계약의 당사자라고 볼 수 있으려면, 금융회사와 출연자 등과의 사이에서 실명확인 절차를 거쳐 서면으로 이뤄진 예금 명의자와의 예금계약을 부정해 예금 명의자의 예금반환청구권을 배제하고, 출연자 등과 예금계약을 체결해 출연자 등에게 예금반환청구권을 귀속시키겠다는 명확한 의사의 합치가 있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로 제한돼야 한다”고 판결했다. 또 “이런 의사의 합치는 금융실명법에 따라 실명확인 절차를 거쳐 작성된 예금계약서 등의 증명력을 번복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명확한 증명력을 가진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증거에 의해 매우 엄격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출연자 등을 예금계약의 당사자로 하기로 하는 다른 합의를 한 것이라고 해석하려면, 금융회사 및 그 담당 직원이 금융실명제법 위반에 따른 행정상 제재와 향후 예금주 확정을 둘러싼 분쟁 발생 위험 등을 감수하면서까지 그와 같은 합의를 하기에 이르렀다고 볼 만한 특별한 사유가 인정돼야 한다는 게 대법원의 논리다. 그렇지 않다면 금융회사가 굳이 위와 같은 불이익과 위험을 부담하면서까지 그와 같은 합의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대법원은 봤다.

이런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예금을 한 경우 예금 명의자의 채권자가 그 예금을 압류할 수 있고 예금 명의자가 해당 은행에서 대출한 때에는 은행이 상계(相計: 채권자와 채무자가 같은 종류의 채권·채무를 갖고 있는 경우 그 채권·채무를 같은 액수만큼 소멸시키는 것)할 수 있기 때문에 명의를 빌린 출연자는 그에 따른 위험 부담을 지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판결은 출연자가 세금 우대 혜택이나 예금자보호법을 적용받기 위해 금융실명제를 위반해 명의를 차용하는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출연자의 부당한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2014년 ‘차명거래금지법’ 시행

이 판결 이후 국회는 2014년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금융실명법)을 개정했다. 첫째, 개정된 금융실명법은 누구든지 불법 재산의 은닉, 자금세탁, 조세포탈, 강제집행 면탈과 같은 탈법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차명거래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를 위반하면 형사처벌(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 대상이 된다. 단순히 동창회와 같은 친목모임의 회비를 관리하기 위해 회장이나 총무 명의로 계좌를 개설해 예금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금융소득종합과세를 회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 명의 계좌에 본인 소유의 자금을 예금하는 경우나 세금우대 금융상품의 가입 한도를 회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 명의의 계좌에 본인 소유 자금을 분산 예금하는 행위 등은 불법 차명거래에 해당한다. 거래자가 불법 목적으로 차명거래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명의를 빌려 준 사람은 공범으로 처벌될 수 있다.

둘째, 이 판결 내용을 명확히 해 실명이 확인된 계좌에 보유하고 있는 금융자산은 명의자 소유로 추정하는 규정을 뒀다. 셋째, 금융회사 종사자는 거래자에게 불법 차명거래가 금지된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하고, 금융회사 종사자가 불법 차명거래의 소개나 권유와 같은 행위를 하면 형사처벌 대상이 되도록 했다.

금융실명제를 위반하는 불법 차명거래가 큰 범죄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먼 곳의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주변이나 나와 관련한 일에서 생겨나는 일이다. 각자가 불법 차명거래와 같이 금융실명제를 위반하지 않는 것이 투명한 사회에 한 걸음 다가서는 길이 아닐까.

■ 2015년부터 비대면 실명확인방식도 허용

고객이 금융상품 가입을 위해 계좌를 개설할 때 금융회사는 고객의 실제 명의(실명·주민등록표상에 기재된 성명 및 주민등록번호)를 확인해야 한다. 실명확인은 고객과 계좌의 명의인이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므로 금융회사 창구 직원이 고객이 제시하는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의 위변조 여부를 확인하고 증표의 사진과 고객의 얼굴을 대조해 본인 여부를 식별하는 방법(대면 확인 방식)을 이용한다. 은행처럼 지점이 많아 고객이 접근하기 편리하고 대면 상품 판매가 중요한 경우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금융서비스가 점차적으로 인터넷뱅킹과 같은 비(非)대면 채널을 통해 이뤄짐에 따라 계좌 개설 때마다 금융회사 창구를 방문해야 하는 불편함이 발생한다. 그리고 대면 확인 방식은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는 핀테크의 발전을 막는 과잉규제가 됐다.

이런 문제점을 없애기 위해 비대면 실명확인 방식도 2015년부터 허용됐다. 비대면 실명확인 방식은 모바일과 같은 비대면 채널을 이용해 더 간편하게 금융거래를 할 수 있으며 업무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금융거래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인터넷전문은행에서도 비대면 확인 방식을 통해 금융계좌를 개설한다.

심영 < 연세대 로스쿨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