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 사옥 다산홀에서 열린 ‘정규재TV 토크파티’에 참석한 팬들이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다. 정규재TV 김형진 PD
지난 28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 사옥 다산홀에서 열린 ‘정규재TV 토크파티’에 참석한 팬들이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다. 정규재TV 김형진 PD
■이영훈 서울대 교수의 '촌철살인' 역사 강의

한국의 '광장 민주주의'는 정신문화 공백이 빚은 허상
자유·독립, 개인의 존재 등 근대인이 배워야 할 가치는 교육과정서 뒷전으로 밀려
20~30대 젊은층 대거 몰려 "역사 공부 다시 하겠어요"


“자유와 독립, 개인의 존재 등 근대시민으로서 배워야 할 가치들이 실제 교육현장에서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주필이 진행하는 ‘정규재TV 토크파티’가 열린 지난 28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8층 강연장은 300여명의 참석자로 가득 찼다. 이들은 강연자로 나선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65·사진)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밖에는 영하 5도의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강연장은 참석자들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민족주의 '환상' 심어준 잘못된 역사 교육 바로잡아야"
이 교수는 촛불집회를 보면서 느낀 점을 밝히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한국은 당비를 내고 정당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진성당원 비율이 전체 국민의 0.8%로 미국(10%)보다 훨씬 낮다”며 “제도화된 정당 참여율은 저조한데 광화문광장에 특정 정치 성향의 사람들이 대거 모이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1960년대 초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이 흑인인권운동을 위해 워싱턴광장에 모인 것보다 한국의 촛불집회 참가자 숫자가 더 많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국 사람들이 무슨 일만 터지면 광화문광장으로 모이는 것은 ‘환상’으로 빚어진 ‘정신문화 공백’의 결과”라며 “‘민족’이라는 환상 탓에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민족이라는 개념은 20세기에 나타난 상상의 공동체”라며 “한반도를 하나의 신체로 인식하고 ‘단일민족’ 등의 혈족주의를 강조하는 게 그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민족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낸 그릇된 역사교육의 사례들을 제시했다.

그는 “세종은 과연 성군일까요?”라며 상식을 뒤집는 질문을 꺼내들었다. 이 교수는 “학교에서는 세종을 성군이라고 가르치는데 그렇게 보기 곤란한 측면들이 있다”고 했다. 양반들의 성군일 뿐 일반 백성에겐 성군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는 “세종은 노비제를 제도적으로 확립하고 기생제도도 만들었다”며 “사대주의를 강화해 양반만의 나라인 조선 근간을 확립한 왕”이라고도 평가했다. 친일파와 반일감정, 건국절 논란 등 일제 강점기에 뿌리를 두고 있는 문제들도 학교에서의 교육 내용과 다른 부분이 적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런 ‘역사적 환상’은 잘못된 교육에서 비롯됐다는 게 이 교수의 생각이다. 자유와 독립, 인간의 존재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내 자유가 중요하듯 다른 사람의 자유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심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석자들은 강연이 끝나자 박수갈채를 보냈다. 대학생 한모씨(28)는 “그동안 민족주의에 빠져 ‘환상’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며 “개인의 가치와 존재 등에 대해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정규재TV 애청자’라는 조모씨는 “어렸을 때 배우고 평생을 믿어온 역사적 환상이 무너진 느낌”이라며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통해 자유와 개인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시민을 키워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이 교수는 정규재TV에서 ‘환상의 나라’를 주제로 역사 강의를 했다. 12편으로 이뤄진 이 강의는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서 조회수 20만여건을 기록하는 등 인기를 끌었다. 그는 27일 자신의 역저인 《한국경제사1, 2》를 출간했다. 이 책은 한반도 역사를 4개 시대로 나눠 경제 발전은 물론 한국인 특유의 개성이 어디서부터 나왔는지를 실증적으로 분석해 학계에서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 보편적 복지에'일침'놓은 정규재 주필

"민족주의 '환상' 심어준 잘못된 역사 교육 바로잡아야"
‘정규재TV 토크파티’ 참석자들은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의 강연이 끝난 뒤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주필에게 최근 현안과 관련된 질문을 쏟아냈다. 2시간으로 예정된 행사가 1시간 가까이 길어질 정도로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정 주필은 ‘정치권에서 기본소득제 논의가 제기되는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모든 국민에게 일정한 소득 하한선을 보장해준다는 발상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으며, 국민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서구의 복지 원리주의자들이 ‘시민의 권리에 기초해 국가에 대한 청구권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논리를 폈는데 그 자체가 인간의 정신이 퇴보해가는 과정”이라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이어 “조만간 대통령선거 국면에 들어가면 기본소득제를 도입하자고 각 대권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나설 텐데 결국은 부가가치세를 올리거나 징벌적 소득세를 물리게 하는 대안을 찾을 것”이라며 “이는 불행한 악순환의 고리를 만드는 길”이라고 우려했다.

정 주필은 ‘최순실 사태’ 여파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주요 회원사가 줄지어 탈퇴하는 현상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그동안 정부가 기업으로부터 사실상 준조세처럼 돈을 걷어왔기 때문에 전경련이 사라지면 정작 불편한 건 정부”라며 “정권이 바뀌면 또 전경련을 만들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또 “이전 대통령들은 전경련을 통해 수천억원씩 모금을 했는데 왜 이번 것만 문제가 됐는지는 미스터리”라며 “정부가 이번 기회에 기업들로부터 돈을 걷는 행태를 그만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국정 혼란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자는 메시지도 전했다. 정 주필은 “많은 국민이 이대로는 정말 안 된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면서도 “다음 대통령이 좀 더 부드러운 리더십을 발휘해 일부라도 개혁을 성공시키고, 북한 정권이 무너져 자유통일을 이루면 대한민국은 다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내비쳤다. 이어 “캄캄한 밤을 깨고 빛나는 태양이 떠오르듯 국민적 화해와 개혁을 거쳐 대한민국이 또 다른 ‘기막힌 스토리’를 쓸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듣던 참석자들은 정 주필의 희망론에 큰 박수로 환호했다.

고윤상/성수영/배정철 기자 k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