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싸움 눈치 속 '양다리'…사실상 폐기수순 관측도

교육부가 내년에는 희망학교에 한해 국정교과서를 사용하도록 하고 2018년부터 국·검정 교과서를 혼용하도록 하면서 내년 역사교과서 전면 국정화는 무산됐다.

여론 악화 속에 일단 '급한 불'은 끈 모양새지만 교육부는 학생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 정책 기조를 손바닥 뒤집듯이 바꿔 교육현장의 혼란을 가져왔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교육부는 지난달 28일 현장검토본 발표 이후에도 "역사교과서는 교육의 문제며 이념이나 정권과는 상관없는 문제"라고 수차례 강조했지만 결국 정국 상황에 따라 방침을 바꿔 국정교과서가 정치적인 차원에서 추진됐음을 자인한 셈이 됐다.

교육부는 당초 지난해 중·고교 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확정 고시하면서 내년 3월 전국의 모든 중·고교(정확하게는 중1, 고1부터)에서 국정교과서를 사용하게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반대 여론이 워낙 높았던데다 '최순실 게이트' 파문까지 겹쳐 교과서 국정화를 당초 계획대로 끌고 갈 동력이 크게 떨어진 것이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부가 선택한 '전면 적용 1년 연기 및 국검정 혼용, 올해 희망학교 우선 사용' 방안은 강행과 철회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놓은 '고육지책', 나쁘게 말하면 '눈치보기' '양다리 걸치기'로 해석된다.

'전면적용 연기'로 일단 비판 여론을 잠재우는 동시에 '희망학교 우선 사용'이라는 단서를 달아 국정화 지지론자들의 주장도 수용한 모양새를 취했기 때문이다.

실제 국정화를 강하게 주장해 온 강경 보수단체 등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국정화를 끌고 가야 한다고 교육부를 압박해왔다.

국정교과서 개발 실무 책임자인 박성민 역사교육정상화추진 부단장은 "교과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지금 내용을 떠나 '최순실 게이트'로 교과서를 비판하기 때문에 동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교육부의 이같은 태도 변화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학교 현장과 학생들에게 돌아가게 됐다.

교육부는 우선 내년에는 국정교과서 사용을 희망하는 모든 학교를 '연구학교'로 지정해 국정교과서를 주교재로 사용하도록 할 방침이다.

연구학교가 아닌 나머지 학교는 기존대로 현행 검정교과서를 사용하게 된다.

연구학교 지정을 위해서는 학교운영위원회 논의를 거쳐 학교장이 신청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국정교과서 사용에 반대하는 학부모와 학생들의 반발 등 학교 현장의 갈등이 예상된다.

교육부는 내년 1월 연구학교 희망 수요를 조사하고, 연구학교에는 학교당 1천만원 등 예산지원도 병행하겠다고 했지만 얼마나 많은 학교가 이런 갈등을 감수하고서까지 연구학교를 희망할지는 미지수다.

학교에 따라 다른 교육과정이 적용되는 것도 문제다.

국정교과서는 새로 개정된 2015 교육과정이, 기존 검정교과서는 현행 2009 개정교육과정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연구학교에서는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수업을 하고, 다른 학교는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수업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봐야 하는 고등학생의 경우 수능 한국사 과목이 필수로 지정된 상황에서 학교에 따라 서로 다른 교과서, 다른 교육과정으로 배우고서 한국사 시험을 치러야 하는 혼란이 생길 수 있다.

이준식 교육부 장관은 27일 브리핑에서 "수능은 공통된 학업성취도로 평가하기 때문에 교육과정이 달라도 문제가 없다"고 밝혔지만 당장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 교육단체는 "어불성설"이라며 반발했다.

또 교육부가 국·검정을 혼용하겠다고 밝힌 2018년은 2015 개정 교육과정이 중1, 고1에 적용되는 첫해여서 중1, 고1은 현행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검정교과서는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국·검정 교과서를 혼용하기 위해서는 현행 검정교과서도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다시 개발해야 한다.

검정교과서는 개발기간이 최소 1년6개월 이상이지만 교육부는 이 기간도 1년6개월에서 1년으로 단축할 수 있도록 대통령령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경우 교과서 부실 개발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검정교과서를 새로 개발하더라도 현재 마련된 편찬기준은 그대로 적용된다.

편찬기준 자체가 국정교과서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만큼 '대한민국 수립' 표현 같은 '건국절' 사관이나 경제개발계획, 새마을 운동 등 산업화 시기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한 내용 등은 보수진영에서 주장했던 내용이 반영돼 있어 이 역시 논란이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정교과서가 사실상 폐기 수순에 접어들었다는 관측도 나온다.

우선 국·검정 혼용은 과거 교학사판 한국사 교과서 사태의 재연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2013년 8월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검정심의위원회는 뉴라이트 등 보수학자들이 쓴 교학사 교과서를 포함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을 합격 판정했고, 이에 야당과 시민단체는 교학사 교과서가 친일·독재를 미화한다며 반발했다.

이러한 논란 속에 이듬해인 2014년 1학기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는 전국에서 단 1곳에 그치는 결과를 낳았다.

교육부도 이러한 점을 의식해 그동안 국·검정 혼용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결국 현실론을 수용한 셈이 됐다.

금용한 교육부 학교정책실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2018년에 최대한 많은 학교가 국정교과서를 선택하게 하겠다"고 밝혔지만 교과서 선택권 자체가 학교장에게 있는 상황에서는 결국 교학사 교과서처럼 학교 현장에서 외면받을 공산이 크다.

게다가 야당이 국정교과서 금지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나섰고, 내년에 조기 대선까지 치러지면 사실상 2018년 국정교과서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차기 정부의 몫으로 넘어간다.

결국 지난 1년여 간 온 나라를 들끓게 한 이번 사태는 정부가 애초부터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일정을 무리하게 당겨가면서까지 정책을 밀어붙이려다 좌초한 사례로 기록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더불어민주당 역사교과서국정화저지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유은혜 의원은 "교육부 발표는 사실상 국정교과서를 지키려는 꼼수로 본다.

교과서 금지법 통과를 위한 절차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전교조 송재혁 대변인은 "1년 유예라고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혼란만 연장하는 꼴"이라며 "깨끗하게 포기하고 전면 철회로 가는 것이 혼란을 없애는 첩경"이라고 말했다.

(세종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zitron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