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시공간서 포착한 삶…무연출의 미학
“장사가 잘되는 게 좋아요, 나라가 편안한 게 좋아요?” 2016년 11월19일 토요일. 서울 서촌 음식문화거리에서 가장 오래도록 과일 장사를 했다는 할머니에게 KBS ‘다큐멘터리 3일’의 VJ가 물었다.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열리는 광화문광장의 촛불집회. 훗날 우리네 역사의 한 대목을 차지할 현장이다. 할머니는 그게 무슨 질문거리나 되느냐는 듯 말했다. “말이라고 하고 있어? 나라가 편안해야지. 그래야 국민도 편안한 거여. 세 살 먹은 아기도 안다.”

특정 시공간서 포착한 삶…무연출의 미학
지난 11일 방영된 ‘다큐 3일’은 ‘서울, 2016년 겨울’이란 부제로 서촌의 먹자골목을 72시간 동안 영상에 담았다. 이 시점에 이 장소를 굳이 선택한 것은 시국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큐 3일’이 들여다본 건 광화문광장 그 자체보다 그곳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독특한 색깔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특정 장소와 시간을 콕 짚어 72시간 카메라를 들이대지만 항상 그 카메라가 주목하는 건 사람들이다.

과일가게를 오래도록 해온 할머니를 들여다보노라면 하루도 빼지 않고 식사거리와 커피를 할머니에게 날라다 주는 이웃 아줌마를 만나기도 하고, 심심해 마실 나온 할머니의 친구를 만나기도 한다. VJ에게 같이 먹자며 이웃 아줌마가 주고 간 칼국수를 내밀고, 한데서 고생한다며 따뜻한 커피를 더 부어주고, 72시간이 지나 헤어질 때는 못내 아쉬워하며 귤과 감을 던져주는 할머니. VJ가 느꼈을 따뜻함이 시청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44년간 방앗간을 운영해온 아저씨와 15년간 라면가게를 하며 학생들이 커가는 모습을 봐왔다는 아줌마, 한때는 무역업을 했지만 지금은 실업자 신세라며 “취업을 위하여!”를 건배 삼아 막걸리를 드시는 60대 초반 어르신들, 퇴근하고 한잔하는 직장인들, 울산에서 올라와 내년에는 꼭 취업을 해 서울에 오겠다는 취업준비생 등. 광장에서 촛불의 열기가 달아오르는 그 시간, 수많은 사람들이 서촌을 들락거린다. 물론 그 속에는 굳이 카메라가 찾아가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시국의 상처와 분노를 토로하는 목소리가 담긴다.

사실 ‘다큐멘터리 3일’은 특별한 연출이라는 것이 없는 다큐멘터리다. 대신 특정 시간에 특정 공간을 선택하는 데 모든 걸 집중한다. 그것이 사실상 모든 이야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이 어떤 공간을 선택하는 것은 그 시점에 그곳이 이미 어떤 의미나 가치를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지난 18일 방영된 ‘다큐 3일’이 충남 보령의 천북 굴 단지를 선택한 건 이 시점에 제철을 맞은 굴 때문이다. 물론 주인공이 굴은 아니다. 그곳을 오래 지켜온 상인들과 잊지 않고 때 되면 찾아와 가족 같은 느낌의 단골들이 주인공이 된다.

과거의 다큐멘터리들은 거대담론을 담는 것을 당연한 숙제처럼 여겼다. 그래서 지금도 다큐멘터리의 원류라고 하면 지구를 몇 바퀴 돌며 얻은 정보를 통해 어떤 하나의 맥락과 통찰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걸 ‘다큐 3일’은 보여준다. 거대담론을 가진 다큐멘터리들이 세상을 보기 위해 지구촌 곳곳으로 날아간다면, ‘다큐 3일’은 오히려 어느 작은 지점의 한 사람을 통해 세상을 본다. 우주는 바깥에만 있는 게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우주라고 하지 않던가.

‘다큐 3일’은 3일 동안의 취재를 통해 그때 그곳에는 어떤 삶이 있었는가를 기록한다. 지극히 사적인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가 보인다. 서촌의 할머니를 보며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지는 건, 각박해질수록 오히려 따뜻한 온기를 원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거기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이게 텔레비전에 나와?” 할머니는 떠나는 VJ에게 물었다. 그 한마디는 ‘다큐 3일’이 그저 촬영이 아니라 현시대에 내미는 소통의 손이라는 걸 말해줬다. 훗날 2016년 겨울의 역사적 현장 속에서 나라 걱정을 하던 한 할머니의 따뜻함으로 기억될….

정덕현 < 대중문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