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계 토론회 "사실보다 변명에 지면 할애해 왜곡"
"냉전회귀, 남북대결, 반공이념 투여한 정치교과서"

정부가 발표한 국정 역사교과서가 헌정유린 세력과 독재를 옹호하고 변명하는 서술로 '함량 미달'이라는 비판이 역사학계에서 이어졌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전국역사교사모임, 한국역사교육학회,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문제연구소 등으로 구성된 역사교육연대회의는 22일 오후 서울시청 대회의실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 현대사 서술 분석 긴급발표회'를 열었다.

발표회에서는 국정교과서가 기초적인 사실 오류가 많고, 사실을 선택적으로 서술해 본질을 왜곡하는 등 교과서로 사용하기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는 주장이 쏟아졌다.

국정교과서의 정치사 서술을 분석한 홍석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국정교과서가 헌정 질서 유린과 독재를 안보 논리와 양적인 경제 성장 논리로 옹호하고 변명하는 서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5·16쿠데타, 3선 개헌 등을 서술하면서 사실과 그에 기반한 평가를 제시하기보다 집권세력이 내세운 명분을 불필요하게 많이 소개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홍 교수는 "교과서 서술은 매우 한정된 지면만을 허용해 아주 중요한 사실만 추려내도 지면이 항상 부족한데, 헌정 질서를 유린한 사람들이 자기 합리화를 위해 내세운 변명을 불필요하게 선택해 소개해 사실보다 변명을 담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통치 수단이던 '긴급조치'에 관한 서술에서도 총 9차례 발동한 긴급조치 중 정치탄압과 인권침해 사례는 소개하지 않고, 에너지 절약, 세금감면 등 경제 문제를 다룬 긴급조치 3호 내용만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편파적인 서술을 했다고 꼬집었다.

홍 교수는 "1천300여명의 구속자를 낸 긴급조치 9호도 그냥 3·1 민주구국선언을 한 인사들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는 정도의 서술만 있을 뿐"이라며 "이렇게 편파적으로 내용을 선택해 유신체제가 경제발전에 기여한 측면도 있다는 것을 사실상 강조한 것"이라고 했다.

경제사 서술을 분석한 정진아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교수는 "국정교과서가 마치 경제사는 정치사와 다른 순경제적인 논리가 작동하는 영역처럼 서술해 역사적 사실의 제대로 된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게 서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박정희 정권이 중화학공업화를 진행하면서 당시 경제기획원조차 반대했지만, 유신독재를 뒷받침하기 위해 급속하게 추진된 측면이 있다는 내용 등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한일회담 반대 시위 당시 박정희 정권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시위대를 탄압한 사실은 언급했지만, 역사적 맥락 없는 사실만 나열했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한일협정이 체결돼 차관이 들어오고 경제건설에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한 뒤 바로 이어서 과거사 청산이 미흡했다는 점을 언급했다.

이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 적극적인 해석 없이 사실을 나열해 '사실을 왜곡했다'는 비판을 피하려 한 전략"이라고 말했다.

허은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박정희 정권 시기 민주주의, 인권, 노동 분야 관련 서술이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고 혹평했다.

허 교수는 "서술이 불충분할 뿐 아니라 그동안 축적된 연구 성과들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며 "일상생활과 사회문화 영역에서 민주주의 억압을 다루는 부분이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다.

남북관계 분야를 살펴본 기광서 조선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국정교과서가 북한과 남북관계, 통일문제를 서술하면서 북한의 부정적인 현상에 대부분 지면을 할애했다고 지적하면서 "냉전회귀, 남북대결, 반공 이념 등을 투여한 정치 교과서의 특징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기 교수는 "분단 체제에서 북한은 적과 동포라는 상호모순된 인식이 존재하지만, 대북 평화와 협력 지향은 국민 대다수의 희망으로 볼 수 있는 만큼 이런 방향에서 서술이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진 토론에서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정부가 학계의 거듭되는 공개 요청에도 교과서를 밀실에서 복면 집필을 통해 제작했다"며 "결국 박정희 예찬 교과서라는 별칭이 붙게 된 국정교과서 목적은 비선에 의한 집필로 달성할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보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국정교과서가 사실 오류로 가득 찬 교과서라며 "일례로 5·16 주도세력이 발표한 '혁명공약'이 소개됐는데, '반공 태세'라는 원문을 '반공 체제'로 임의로 바꾸었다.

원자료까지 집필자 마음대로 바꾸는 역사교과서가 세상에 어디 또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서울연합뉴스) 김동규 기자 dkkim@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