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더미 오른 축산농…보상금 대부분 계열사 챙기고 농가는 빚 떠안아
위기경보 '심각' 상향되며 산란계 농장 입식 꿈 못 꾼 채 '한숨'

"30년 이상 닭 농사를 지었는데 올해처럼 속수무책인 적은 없었어. 폐사한 닭이 눈에 띄어 축사를 한 바퀴 돌며 점검했더니 또 죽어 있고, 잘못 봤나 싶어 한 바퀴 더 도니 더 많이 죽어 있고…"

충남 아산 신창면에서 산란계 농장을 운영하는 김 모(64) 씨의 축사는 지금 텅 비어 있다.

자식처럼 키우던 닭을 무더기로 죽여 땅에 묻던 지난 16일이 김 씨에게는 '악몽'으로 기억될 뿐이다.

지난달 중순 조류 인플루엔자(AI)가 터졌다는 뉴스를 본 뒤 아침, 저녁으로 눈코 뜰 새 없이 양계장과 주변을 소독했다는 그는 왜 자신의 농장에서 AI가 발생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닭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는 듯 축사 안쪽을 기웃기웃하다가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만 연신 내쉬었다.

김 씨는 20일 "5만 마리의 닭과 수십만 개의 달걀을 땅에 묻었는데 피해액 산출도 안 되고 보상이 얼마나 나올지도 모르겠다.

난 이제 망했다"고 망연자실해 했다.

◇ 계열사 '슈퍼 갑', 농가는 빚 안 생기면 다행
지난달 16일 전남 해남과 충북 음성에서 닭·오리 집단 폐사를 초래한 고병원성 H5N6형 AI 바이러스가 파죽지세처럼 전국을 휩쓸고 있다.

19일 오전 0시 기준 전국 8개 시·도, 27개 시·군에서 살처분된 가금류는 1천910만8천 마리에 달한다.

정부가 살처분 보상금을 지급하고 생활안정자금을 지원한다지만 계열화 농장 주인들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감당하기 어렵게 늘어날 빚 걱정 때문이다.

충북 진천에서 육용 오리를 모두 살처분한 김 모(67) 씨는 "보상금이 나와 일부를 받아도 새끼오리 입식비와 사료 대금 등을 빼고 나면 빚을 떠안아야 할 처지"라고 목소리를 키웠다.

계열화 농장이 키우는 오리는 이들 소유가 아니다.

계열사가 지원한 새끼오리를 위탁받아 40여 일 키운 후 납품하면서 1천 원 안팎의 사육 수수료를 챙기는 게 전부이다.

그렇다 보니 살처분 보상금이 나와도 소유주인 계열사가 대부분 챙겨간다.

축사 난방비나 인건비, 축사 바닥에 까는 톱밥 구입비 등을 달라고 하소연할 데도 없다 보니 농가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슈퍼 갑'의 위치에 있는 계열사들이 AI로 인한 피해를 축산농가에 떠넘기고 있다는 게 김 씨의 주장이다.

AI로 인한 피해를 걱정해 오리 사육을 포기하고 싶어도 계열사로부터 받을 불이익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사육에 나서는 농가도 있다.

충북 음성에서 오리를 키웠던 이 모(65) 씨는 "AI가 걱정돼 겨울철에 오리 사육을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내년 봄에는 새끼오리를 공급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마지못해 사육하다가 화를 당했다"고 털어놨다.

정부의 살처분 보상금을 받게 되는 계열사로서는 AI가 터져도 가공·판매에 따른 이익을 얻지 못할 뿐 큰 손해는 없다.

이 씨는 "이렇게 말했다는 걸 계열사가 알면 날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 "입식 언제 다시 하나" 산란계 농장도 걱정 태산
경기 포천에서 산란계 농장을 운영하는 정 모(52) 씨는 지난 11일 닭 30만 마리와 달걀 150만 개, 사료 40여t을 모두 매몰 처리했다.

닭값에 달걀·사료 가격까지 더하면 그 피해가 20억 원을 훌쩍 웃돈다.

AI라는 말만 들어도 분통이 터질 지경이다.

정 씨는 "AI가 퍼지는데 어느 농가가 방역을 소홀히 하겠느냐"며 "AI는 천재지변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피해가 막심하지만 정 씨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입식 시기를 짐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재기 준비를 해야 할 텐데 위기경보가 '경계'에서 '심각' 단계로 상향되면서 입식 시기를 가늠하기 어렵게 됐다.

AI가 종식되어도 환경검사에 시험사육 등을 거치다 보면 4∼5개월 후에 재입식이 가능하다.

정 씨는 "아버지 때부터 40여 년간 닭 농사만 지어 지금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다"며 "언제 AI가 끝날지 가늠할 수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산란계 60만여 마리를 키우는 경기 평택시 고덕면의 농장에서는 살처분이 한창이다.

지난 18일 AI가 터졌는데 마릿수가 많다 보니 살처분도 늦어지고 있다.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게 매몰 처리해야 할 달걀도 309만 개에 달한다.

이 농장의 한 직원은 "방역을 철저히 했는데 왜 AI가 발생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농장 옆 80여m 거리에 철새 도래지인 진위천이 있다 보니 AI를 퍼뜨린 주범이 철새로 짐작될 뿐이다.

이 직원은 "복구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알기도 어렵고 재입식이 언제가 될지도 짐작할 수 없다"며 망연자실했다.

◇ "겨울철엔 차라리 키우지 말자"…'휴업보상제' 요구 커져
2003년 12월 고병원성 AI가 국내에서 처음 터진 이후 올해 3∼4월까지 살처분된 가금류는 무려 4천414만6천 마리에 달한다.

이번 겨울철에도 한 달여 만에 2천만 마리에 가까운 가금류가 살처분되면서 AI로 인한 피해는 6천만 마리를 넘어서게 됐다.

AI로 막대한 피해를 보는 가금류 사육농가들은 정부 차원의 근본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그 대책의 하나가 '휴업보상제' 도입이다.

가을철에 미리 도축해 닭이나 오리 고기를 비축한 뒤 AI가 창궐하는 겨울철 3개월 만이라도 사육을 중단하고, 그 대신 정부가 농가에 사육 중단에 따른 보상금을 지원하자는 것이다.

AI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릴 때 가금류를 키우지 않으면 피해가 날 일도 없다는 취지다.

해마다 AI 살처분 보상금이나 생계안정자금, 방역비 등으로 쓰이는 예산을 고려하면 차라리 휴업보상금 규모가 더 작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AI가 처음 터진 2003년 874억 원, 2006∼2007년 339억 원, 2008년 1천817억 원의 재정이 소요됐다.

피해가 컸던 2014∼2015년에는 2천381억 원에 달했다.

충남 천안에서 오리농장을 운영하는 이 모(33) 씨는 "11월에서 이듬해 2월 중순까지 농장 문을 닫게 되면 수천만 원을 포기해야 하는데,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금이 지급된다면 휴업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충북도는 이미 정부와 국회에 이 제도 도입을 건의했다.

AI 방역 상황 점검 및 관계자 격려차 지난 16일 충북 진천군청을 찾은 정세균 국회의장은 취재진과 만나 "(휴업보상제) 전국 시행이 어렵다면 충북에서 시범사업을 한 뒤 효과를 판단해 보도록 심도 있게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김용윤, 김종식, 심규석, 우영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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