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의 시대…복수 원하면 분노 아니라 실력으로 갚아라
불의(不義)의 시대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기도 하다. 당장에라도 이 어이없음을, 분노를 표출하고 싶다.

SBS 월화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어린 주인공 강동주(윤찬영 분)는 야구 방망이를 들고 한 병원 응급실로 돌진했다. 유명 정치인을 먼저 치료한다는 이유로 우선순위에 밀린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한 병원의 기물을 부수며 울부짖었다. “왜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해. 의사가 그러면 안 되잖아.” 사건에 대한 1차적 욕망의 표출이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79)는 저서 《존재와 사건》에서 “인간이 사건을 응시하는 깊이있는 시선을 갖출 때, 진리의 본질을 볼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사건은 신념이나 이념이 생기는 계기가 되고, 이는 새로운 사회 현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1차적 욕망을 분출하는 어린 강동주에게 천재 의사 김사부(한석규 분)는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던져 그가 신념을 갖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진짜 복수 같은 걸 하고 싶다면 그들보다 나은 인간이 돼라. 분노 말고 실력으로 갚아줘. 네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강동주는 변했다. 외과의가 되기 위한 수련에만 열중하고, 잡다한 인간관계는 접으며 살아왔다. 그에게도 흠모의 대상이 있었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응급의학과 전공의 윤서정(서현진 분)이다. 강동주에게 동기부여를 해준 윤서정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 뒤 잠적한다.

외과 전문의가 된 강동주는 거대 병원의 분원인 돌담병원에서 사고 후유증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윤서정과 재회한다. 야망에서든 인간애적으로든 쓸모있는 의료인으로 성장하고 싶어하는 이 두 청년 의사는 돌담병원 외과 과장인 김사부의 지도를 받는다.

“욕망은 모방적 경쟁에서 나온다”고 한 프랑스 문학평론가 르네 지라르(1923~2015)의 이론처럼 강동주와 윤서정이 김사부를 닮고자 하는 욕망은 드라마의 핵심 엔진이다. 김사부가 자신을 좌천시킨 뒤 십수 년 지방 병원에 틀어박히게 한 거대 병원의 불의에 맞서는 노련한 대응은 맛깔스러운 부속 엔진이다. 이런 흐름과 촌철살인 어록에 시청률도 뻥 뚫렸다. 첫 회 시청률 9.5%(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로 시작해 8회 만에 21.7%를 돌파했다.

의학 드라마지만 기존의 문법을 답습하지는 않는다. 역동적이고 빠른 호흡의 수술장면 이상으로 충격적인 것은 외과 수술이 필요한 환자들이 당하는 사건 사고다. 철근 콘크리트에 복부를 관통당한 환자나 사이클로 국도를 질주하던 동호회 회원들의 연쇄 교통사고 장면은 기대 이상으로 섬세하게 묘사돼 절로 비명을 토해내게 한다.

김사부의 온갖 담금질에 “제대로 사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제대로 살라고 가르치지 말라”며 반항하는 강동주도 사실은 불신과 불의의 시대에 생존하려는 겁 많은 청년이다. 응급 환자를 마주하고 김사부 따라하기에 나선 강동주에게 김사부는 혹독한 일침을 던진다. “상황에 따라, 상대방 입맛에 따라 변하는 건 원칙이 아니라 궤변이다. 상황에 따라 그 원칙이 변하는 놈에게는 무시와 조롱밖에 해줄 게 없다.” 소신을 가지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라는 의미지만 이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치료만 하는 의사가 아니라 사고 현장에서 마치 구조대원처럼 환자를 구해내는 김사부야말로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실한 존재 아닐까. 알랭 바디우의 사건에 대한 해석은 그래서 더 와닿는다.

이주영 < 방송칼럼니스트 darkblue888@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