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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강원도 철원 최전방 군부대에서 육군 일병이 선임병의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뒤늦게 공개됐다.

시민단체 군인권센터는 24일 서울 중구 NPO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해당 사건을 군이 은폐 축소했다며 가해자들을 처벌할 것을 촉구했다.

군인권센터에 따르면 올해 2월 7일 새벽 철원에 있는 육군 6사단 7연대 소속 GP(휴전선 감시초소)에서 근무 중이던 박모 일병(21)이 총으로 자신의 턱을 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 일병은 지난 해 9월 해당 부대에 전입한 이후 선임병들로부터 구타와 가혹행위, 폭언에 시달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지난해 9월 선임병 유모 병장(전역)이 근무가 미숙하다며 개머리판으로 박 일병을 때리는 등 사건이 있었다”며 “1월부터 한달 동안 같은 분대 제모 상병(전역), 김모 상병, 임모 일병 등 선임병들로부터 상습적인 구타와 폭언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이어 가해자들은 “강간하고 싶다" “OO먹고 싶다” 등 박 일병의 어머니·누나에 대한 성적 농담까지 일삼았다고 지적했다.

박 일병은 사건 일주일 전부턴 선임병들의 교대근무까지 떠맡아 영하 10도의 혹한 속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근무했다. 이 시기는 북한의 4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 따른 대북확성기방송 재개, 개성공단 폐쇄 논란 등으로 남북 간 대치 분위기가 고조돼 사병들의 근무도 늘어난 때였다. 임 소장은 “이 기간 중 박 일병은 하루 5시간 이상 자지 못했고 그마저도 2~3시간씩 나눠잤고, 빨래와 잡일도 도맡았다”며 “원칙대로라면 균등히 나눠져야할 비상대기 근무 부담이 박 일명 한명에게 몰리는 동안 어느 간부도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군인권센터는 선임들의 이 같은 가혹행위가 박 일병의 자살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강조했다. 박 일병 생전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기록이나 일기, 친구 증언 등을 바탕으로 ‘심리부검’을 진행한 결과 정서적으로 안정된 가족 안에서 성장해 교우관계 등에 문제가 없었고 정신질환을 겪은 적도 없다는 게 군인권센터의 설명이다.

이 사건은 지난 9월 유가족이 군인권센터에 찾아오면서 외부로 알려지게 됐다. 가해자 제 상병 등 4명은 폭행 및 초병폭행 혐의로 군사법원 재판에 넘겨졌지만 지난 6월 모두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1심 재판부는 “젊고 초범이며 반성문 작성했다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임 소장은 “군이 유가족들에겐 가해자들에게 엄벌을 내리겠다고 얘기해 안심시켜놓고 실제론 사건을 은폐하려했다”며 “이 사건이 가혹행위로 인한 사망사건임에도 군법원은 단순한 폭행 사건으로 치부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군은 해당 GP의 간부를 포함해 지휘계통에 있는 장교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형사적 책임을 묻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임 소장은 “올 2월에 해당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군 당국이 이를 공표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졸속재판”이라며 “관할 법원은 마땅히 가해자 전원에게 실형을 선고해 법의 준엄한 심판을 보여줘야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육군본부는 “군인권센터 측 주장의 진위여부를 확인 중”이라고 밝혔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