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사회 "치열하게 살며 한 계단씩 올라온 삶 부정당한 느낌"
"국민들에겐 3·5·10 지키라더니 위에선 온갖 부정 횡행…배신감"

'최순실 국정 농단' 파문이 가져온 충격파에 온 국민이 허탈감과 배신감에 빠졌다.

한 달여 전만 해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청탁 문화와 특권 의식을 근절하기 위해 도입된 '부정청탁 및 금품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하 청탁금지법)이 부패를 척결, 투명하고 깨끗한 사회를 이룰 것이라고 기대했던 터다.

국민은 청탁금지법이 정한 '식사 3만원·선물 5만원·경조사 10만원' 틀을 혹여나 어길지 몰라 잔뜩 몸을 웅크린 채 근신해왔다.

그런데 정작 대통령 뒤에 숨어 호가호위하는 자들의 말 한마디에 수십억, 수백억원이 오갔다.

온갖 부정이 전방위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의혹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법이 정한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정직하게 살아온 국민은 억울함마저 든다.

24년째 공직에 몸 담아온 A(52·충북 청주시)씨는 요즘 무기력감에 빠져 퇴근후 술잔을 기울이는 일이 잦아졌다.

최순실 관련 의혹이 처음 언론에 보도됐을 때만 해도 설마 설마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의혹의 상당수가 사실로 드러나고, 믿기 어려운 부당 행위가 봇물 쏟아지듯 나오면서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

국민을 섬기는 공복(公僕)의 한 사람인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지금까지 한발 한발 살얼음 걷듯 근신하며 걸어온 공직자의 길이 무의미해지는 것 같았다.

A씨는 지난 9월 28일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잡혔던 모임이나 약속을 모두 취소했다.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다.

공무원이니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최순실 사태'를 지켜보며 무엇을 위해 그토록 '범생이'처럼 살아왔는지 스스로 반문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34살의 헬스 트레이너가 3급 행정관으로 청와대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20여년간 한 단계씩 착실하게 쌓아온 공직 경력이 너무 빈약하고 초라하게 느껴졌다"고 탄식했다.

전북 고창군의 한 초등학교 교사 B(38·여)씨는 청탁금지법이 시행된 직후 학생의 할머니가 직접 키워 가져온 늙은 호박 한 개가 '직무 관련성 금품'에 해당될 수 있다고 여겨 손사래를 치며 되돌려보낸 경험이 있다.

조손 가정이 많은 시골 특성상 손주를 돌보고 가르쳐준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농사지은 작물을 가져오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더러 있었고, 예전엔 마지못해 받기도 했다.

그러나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에는 얼굴까지 붉히며 완강하게 사양한 그였다.

호박 하나도 뇌물로 여겨 민망해 하는 어르신을 냉정하게 돌려세운 그에게 '최순실 사태'는 충격 그 자체였다.

B씨는 "서운해하는 어르신을 되돌려 보낸 건 죄송스러웠지만 법을 준수한 건 잘한 일이라고 안위했던 내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고 허탈해했다.

그는 "최순실의 딸을 위해 재벌들이 수십억원을 내놓고, 고위 공직자들이 막무가내로 그 뒤를 봐주는 현실에서 아이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까봐 교육자로서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일반인들이 느끼는 감정도 공직사회 못지않다.

경기도 파주에서 통장직을 맡은 C(56)씨는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서먹한 상황'을 자주 경험했다.

매월 하는 이통장협의회가 끝나면 회의수당(3만원)을 걷어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던 관례가 사라졌다.

우애를 돈독히 하면서 소통하는 창구를 법이 막았다는 불만이 많았지만 나라가 시키는 일이니 군말 없이 따랐다.

그런데 '최순실 사태'를 보고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라고 C씨는 토로했다.

그는 "국민은 밥 한 끼 먹는 것도 눈치를 보는데, 누군가는 뒤에서 부당하게 엄청난 국민의 혈세로 제 배만 불리고 있었다"며 "국민을 상대로 한 대사기극"이라고 비난했다.

극에 달한 국민적 분노를 달래고 무너진 사회적 신뢰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제기된 의혹에 대해 명명백백하게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 처벌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는 "민초들에게는 '3·5·10' 테두리 안에서 정의롭고 정직하게 살라면서 최순실 게이트 관련자들은 끝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광범위하게 국정을 농단했으니 기가 찰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충격을 넘어 말할 수 없는 참담함과 자괴감을 느끼는 국민의 신뢰를 되찾는 유일한 방법은 성역없는 수사와 단죄뿐"이라고 강조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상처받은 국민에게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지금의 잘못된 사회적 부조리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국종합연합뉴스) 전창해 기자 jeonc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