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주말 드라마 ‘옥중화’에서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권력을 누리며 전횡을 일삼는 정난정.
MBC 주말 드라마 ‘옥중화’에서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권력을 누리며 전횡을 일삼는 정난정.
지난달 30일 MBC 주말 드라마 ‘옥중화’에선 무당이 정난정을 제거하려는 종금에게 오방낭을 건넸다. 무당은 “간절히 바라면 천지의 기운이 마님을 도울 것”이라고 했다. 정난정은 이 드라마에서 최고 권력자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배후에서 국정을 농단하는 ‘비선 실세’다.

그는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의 첩이자 왕후의 최측근이 돼 온갖 권세를 누린다. 심지어 측근을 내세워 상단을 운영하면서 각종 이권도 마구잡이로 챙긴다. 그들의 이권 앞엔 외교와 국가안보 문제도 대수롭지 않다. 이 때문에 나라 전체가 위기를 맞는다. MBC 관계자는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설친 정난정과 윤원형의 얘기가 지금의 현실과 너무나 잘 들어맞아 드라마에 (오방낭을) 반영하게 됐다”며 “조선의 역사를 돌아봤을 때 지금의 현실과 가장 잘 맞는 시기가 바로 정난정이 국정을 농단했을 때”라고 설명했다.

최순실 씨와 그 측근들의 국정 농단 사태를 패러디하거나 비슷한 스토리의 드라마가 주목받고 있다. tvN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15에서는 최씨의 딸 정유라 씨의 이화여대 부정입학 의혹을 풍자했다. 극 중 영애가 말을 타는 장면에 “말 타고 ‘이대’로 가면 안 돼요.” “말 좀 타셨나 봐요? 리포트 제출 안 해도 B학점 이상”이라는 자막을 내보냈다.

드라마 뺨치는 현실에…다시 조명 받는 드라마 속 '최순실'
커튼 뒤 검은 권력의 추악함을 현실적으로 드러낸 드라마들도 뒤늦게 화제가 되고 있다. 2014년 방송된 JTBC ‘밀회’가 대표적인 사례다. 여성 편력이 심한 서필원 서한그룹 회장, 호스트바 출신인 어린 남성과 불륜에 빠진 그의 딸 서영우는 돈으로 사람들을 하인처럼 부린다. 서영우는 호스트바 출신 내연남을 자신의 사업 파트너로 둔갑시켜 ‘이사’ 직함을 주고 공공연히 밀회를 즐긴다. ‘최순실 게이트’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와 닮았다.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소재도 놀랍도록 비슷하다. 극 중 백 선생이 홀로 키운 딸의 이름은 정유라. 피아노를 전공한다. 백 선생의 직업은 ‘투자전문가’로 위장한 무속인이다. 서한그룹은 온갖 불법 행위를 저지르며 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백 선생에게 투자 자문을 받곤 했다. 서한예술재단 이사장과의 돈독한 관계를 빌미로 정유라를 명문대인 서한대 음대에 부정입학시킬 수 있었던 이유다.

정유라의 모습도 현실과 판박이다. 출석도 하지 않고, 그룹 과제도 매번 빠지는데 학점은 잘 받는다. 백 선생이 지도교수나 재단 관계자를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극 후반부에 모녀가 해외로 도피한다는 점도 최순실 모녀의 행적과 닮았다.

피아노과 입학 실기시험을 앞두고 조교가 “124번 이선재, 125번 정유라, 126번 최태민”이라며 출석을 부르는 장면에서 시청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성주 작가에게 ‘예언자’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일부 네티즌은 정 작가와 최순실의 나이가 같은 점, 정 작가가 이화여대 출신인 점을 거론하며 상상력을 넓혀갔다. 작가는 “우연의 일치”라고 선을 그었다.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 유아인 역시 “저도 신기했다”고 말했다.

tvN 금토 드라마 ‘더케이투(The K2)’에는 차기 대통령직을 두고 여론을 사로잡기 위해 ‘쇼’를 벌이는 장세준의 모습이 수시로 그려진다. 강력한 대선 후보인 그는 사실 ‘장기 말’에 불과하다. JB그룹의 맏딸인 아내 최유진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지휘하는 실세다. 최유진이 수족처럼 부리는 경호업체 JSS는 공권력도 못 건드리고, 모든 정보를 통제하는 슈퍼컴퓨터까지 보유하고 있을 정도다.

MBC 드라마 ‘선덕여왕’의 미실.
MBC 드라마 ‘선덕여왕’의 미실.
주술과 미신의 힘을 빌려 권력을 주무른 점에서는 2009년 방영된 MBC ‘선덕여왕’의 미실도 떠오른다. 미실은 색공술을 무기로 진흥왕을 휘어잡은 뒤, 진흥왕이 죽자 꼭두각시 왕을 앉혀놓고 ‘미실의 시대’를 선언했다. 최씨의 아버지 최태민은 기독교·천도교·불교를 합쳐 ‘영혼합일설’을 주창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태민은 딸이 꿈을 통해 자신의 예지력을 이어받았다고 여긴 것으로 전해졌다.

정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SBS ‘풍문으로 들었소’는 대한민국 상위 1%의 세계를 그리면서 이 세계 사람들 역시 무술과 부적에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권력과 재력을 두 손에 쥔 주인공 한정호가 겉으로는 이보다 더 바르고 점잖을 수 없지만, 사실은 비뚤어진 선민사상으로 무장한 자라고 드라마는 고발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