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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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없으면 너희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게시글 중 일부다. 최씨의 ‘국정농단 파문’ 와중에 이 글은 많은 국민의 분노를 샀다. 하지만 분노보다 씁쓸함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바로 사내 ‘낙하산’과 ‘비선 실세’로 고통받는 김과장 이대리들이다.

능력 없는 낙하산 직원이 저지른 실수를 수습하는 김 과장은 오늘도 자신의 ‘흙수저’를 탓할 수밖에 없다. 이 대리 회사 내에선 오너 일가를 들었다 놨다 하는 비선실세에 대해 끊임없이 루머가 나돌고 있다. 김과장 이대리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회사 내 ‘비선실세’

소수이긴 하지만 일부 기업에서는 사장을 움직이고, 경영에 관여하는 최순실형 비선실세가 존재한다. 여기엔 ‘역술인’과 관련된 루머가 많다.

중견기업에서 일하는 최 차장은 한때 대기업에서 근무했다. 몇 년 전 계열사 대다수가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그룹은 해체됐다. 최 차장도 이 과정에서 직장을 옮겼다. 최 차장은 ‘최순실 사건’을 보며 몇 년 전 일을 떠올린다. 당시 회사가 어려워질 때 “추리닝을 입은 사람이 비선실세”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추리닝을 입은 젊은 남자가 별다른 통제 없이 회장실을 들락날락하면서 “사실상 그룹 구조조정을 총괄한다”, “계열사 사장들을 모아 지시를 내렸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일부 언론은 이런 소문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는 유명 역술인으로 알려졌다. 최 차장은 “그때도 기가 찼는데, 최순실 사건을 보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참 많이도 퍼져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한 중견 제약사는 회사 이름을 역술인이 지어준 것으로 유명하다. 오너 회장이 회사명을 정한 지 2년 만에 매출이 줄어드는 등 경영에 어려움을 겪자 역술인에게 달려간 것이다. 역술인은 그 전 이름과는 전혀 다른 사명(社名)을 ‘점지’해 줬다. 2년 만에 다시 바뀐 사명 탓에 영업 현장에선 혼란이 생겼고, 사명 변경에 따른 갖가지 부수 업무로 김과장 이대리들은 동분서주해야 했다.

2010년까지 대기업 계열 건설사에서 일한 안 과장은 어느 날 갑자기 ‘금고 옮기기’에 동원됐다. 당시 사장이 풍수지리 전문가를 불렀는데 그가 “금고를 저기에 두면 좋지 않으니 이쪽으로 옮기라”고 충고한 탓이다. 영문도 모르고 불려 올라간 직원들은 끙끙대며 위치를 바꿨다. 하지만 그 전문가의 충고가 맞지 않아서일까. 안 과장이 퇴사한 뒤 이 회사는 재무상태가 악화돼 최근 사옥까지 팔고 이사해야 했다.

능력 없이 실세되는 ‘오너’ 낙하산

중견기업에서 근무하는 이 과장은 ‘정유라 대입 특혜 의혹’에 놀라지 않았다. 회사 내에도 ‘누구누구의 자녀’라는 이유로 한 자리씩 차지하는 걸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이 과장은 “우리 회사만 해도 나보다 경리 일을 하는 사원 김모씨의 입김이 훨씬 강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오너의 조카라는 이유로 직원 사이에서 팀장급 대우를 받고 있다. 사원에 불과하고 업무 능력도 그저그렇지만 힘 있는 팀장들조차 그에게 사안 하나하나를 보고하며 처리하는 눈치다. 이 과장은 “오너의 조카라는 이유로 사실상 회사에서 실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굴욕감이 들 정도”라며 “이직을 결심하고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유통업체 마케팅팀에서 일하는 김 대리는 최근 인사발령을 보고 착잡했다. 마케팅팀은 사내에서 우수 인재만 들어가는 부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동안 능력도 떨어지고 학벌도 좋지 않은 수상한 인재가 한 명 있었다. 알고 보니 오너 일가의 친척이었다. 이 사실을 안 동료들은 그를 ‘로열 직원’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최근 이 로열 직원은 해외 지사 부문장으로 발령이 났다. 모두가 손꼽는 최고의 지역에 그것도 승진 발령이었다. 김 대리는 “초고속 승진의 배경에는 오너 일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직원이 대다수”라며 “부모도 실력이라는 말은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대기업에 다니는 박 과장은 2014년 말 부서장으로 온 김 전무를 모시면서 궁금증이 커졌다. 이미 분리된 예전 그룹 계열사에서 옮겨온 데다, 예절 바르고 사람은 좋았지만 별달리 업무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다. 알고 보니 과거 창업주 회장님을 20년 가까이 지근에서 모시던 비서 출신이라는 얘기가 들렸다.

그렇게 2년을 ‘널널하게’ 보내던 김 전무는 지난달 그룹 소속의 재단 이사장으로 다시 옮겨갔다. 할 일은 없지만, 월급은 많아 ‘꽃보직’이라고 소문난 자리였다. “비서를 하면서 창업주 회장의 가족사 등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비밀을 많이 알아서 그런지 승진도 빨랐고 회사에서 끝까지 챙겨주더군요.”

낙하산 종류도 여러 가지

한 공기업에 다니는 김 차장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윗사람들이 우수수 바뀌는 걸 몇 번이나 목격했다. 입사할 땐 주요 임원이 다 전라도 출신이었는데, 경남(부산)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몇 년째 경북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다. 처음엔 출신이 궁금했지만, 이제는 묻지도 않는다. 청와대 비서실, 대선 캠프, 여당 출신이 다수다. 공무원 출신도 가끔 있다. 문제는 이들이 낙하산으로 떨어질 때 일부 직원을 데리고 들어올 때가 있다는 거다. “나는 수백 대 1 경쟁률을 뚫고 들어왔는데, 어떻게 들어온지 모르는 계약직 직원이 꽤 있습니다. 모 임원과 이상한 소문이 난 여직원도 있고요. 회사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직원 20명 안팎의 작은 광고회사에 다니는 정씨는 최근 대표이사 비서인 김모씨의 연봉을 전해듣고는 깜짝 놀랐다. 2년차 직원인 김 비서의 연봉이 7000만원에 달했기 때문이다. 연봉제여서 직원마다 연봉 수준이 다른 건 알았다. 하지만 4년차인 자신의 연봉이 약 4000만원임을 감안할 때 차이가 너무 컸다.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찰나 그는 김씨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됐다. 바로 대표와 연인 관계였던 것. 정씨는 “김씨 연봉과 정체를 알고 나니 일할 의욕이 확 떨어졌다”고 말했다.

정보기술(IT)업체에 근무하는 송 대리는 매년 들어오는 낙하산 인턴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작년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해외 대학을 졸업한 의문의 인턴이 한 명 들어왔다. 이 인턴은 출퇴근 시간을 지키지 않는 건 물론이고 인턴 기간 두 달 중 한 달여를 조퇴했다. 궁금해 이 인턴의 ‘출처’를 조사한 결과 사장 친구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올해 역시 새 유형의 낙하산 인턴이 송 대리 밑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고객사 사장의 딸이었다. 그는 “단기 인턴은 정식 채용절차가 있는 게 아니어서 낙하산 종류가 참 다양한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김태호/노경목/이수빈 기자 highk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