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광장과 밀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는 두 가지 상징이 나온다. 광장과 밀실이다. 광장은 격동의 공간이다.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 몫 끼기를 원하는” 바로 그 광장이다. 그에 반해 밀실은 침잠하는 공간이다.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는 그 공간은 밀실이다.

작가는 진정한 광장을 찾으려 하지만 끝내 좌절하는 주인공 이명준을 그렸다. 명준은 “남한엔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죽었다”며 월북한다. 그러나 집단주의로 꽉 막힌 북한의 광장에 절망한다. 결국 그는 중립국으로 향하는 배에서 투신자살한다. 4·19 직후 달라진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남북한의 이념적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다뤘지만 작가는 광장과 밀실의 소통을 원했다. 그는 인간을 광장이나 밀실 어느 한쪽에 가둘 때 “광장엔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는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고 경고했다.

지금의 나라 꼴이 꼭 그렇다. 사담이나 나눌 밀실이 이권과 인사를 청탁하는 야합의 공간으로 변한 것이 문제다. 거기다 어둠의 사람들이 밀실을 열고 광장에까지 밀려나와 설치고 다닌 게 문제였다. 광장은 원래 위험한 공간이다. 민주적으로 보이지만 군중이 모이면 집단적 광기로 흐를 수도 있다. 확성기 소리가 고막을 찢고 스크럼이라도 짜고 서 있으면 전진하는 역사의 전선 맨 앞에 있다는 감격과 격동에 휩싸인다. 그것은 필시 광기로 이어진다. 광장의 이런 속성을 잘 알았던 세계 주요 왕조들은 왕궁 근처에는 아예 광장을 허용하지도 않았다. 이미 있는 경우라면 가까이에 언제든 활이나 총을 쏠 수 있는 망루나 저격대를 마련해 뒀을 정도였다.

더 큰 문제는 문명의 진보와 더불어 새로운 광장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인터넷 혹은 소셜 광장은 실제 광장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 한 포털 게시판의 이름은 광장을 뜻하는 ‘아고라’를 쓰고 있다. 이 사이버 광장의 위험성은 가늠하기 어렵다. 사이버 공간은 광장의 특성과 밀실의 속성을 공유한 야누스적 존재다. 얼굴을 감추고 이름을 숨긴 채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과정에서 파괴력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진실보다 댓글이 설득력을 얻고 집단의 광기 속에 소수 의견은 묻히고 만다.

다시 광장의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다. 광장은 벌써 군중으로 몸살이다. 부디 광우병 같은 또 하나의 환영은 아니기를 ….

권영설 논설위원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