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계속 술에 취해 전국 곳곳 누벼…차 안에 술병 굴러다니기도
"무심결에 마신 한잔이 '사약'…장거리 운전 규제 등 여건 개선해야"

화물차 운전자의 가장 큰 적은 피로다.

열악한 근무여건 탓에 밤낮없이 하루에도 몇 차례 장거리 운전을 하다 보면 피로는 쌓이기만 하고, 눈꺼풀은 무겁기만 하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주 40시간 5일제 근무에 최대 12시간 연장근무를 허용하지만, 운수업에서는 공중 편의라는 명목으로 근로시간 추가 연장이 허용된다.

화물차 운전자들은 한 번 운전석에 앉으면 꼼짝 없이 수백㎞씩 운전하고, 며칠씩 집에 못 들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피로에 찌들고, 홀로 운전하느라 외롭고 적적한 이들은 술이나 마약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몰려오는 졸음을 쫓고 피로를 달래주는 위안거리라는 생각에서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11일 마약 환각 상태에서 차를 운전한 화물차 운전기사 김모(50) 씨 등 18명을 적발해 7명을 구속했다.

이들은 "운전 중 졸음을 쫓을 수 있다"는 말에 지난 4∼6월 필로폰을 50여 차례 투약한 뒤 환각 상태에서 화물차를 몰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이 운행한 코스에는 당연히 고속도로도 포함돼 있다.

지난 4일에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한 아파트 앞에서 음주 상태로 운전하던 김모(42) 씨의 18t 화물차가 신호를 기다리던 시내버스를 그대로 들이받고 버스정류장을 덮쳤다.

이 사고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30대 여성이 화물차에 다리를 깔려 중상을 입었고 버스 승객 10명도 다치는 날벼락을 맞았다.

김 씨는 혈중 알코올농도 0.12%의 만취 상태에서 운전하다 사고를 낸 것으로 경찰 조사 결과 밝혀졌다.

술이 화물차 운전자들의 일상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 보여주는 사고도 잇따랐다.

지난 8월 강원도 인제경찰서에 적발된 김모(60) 씨는 이른 아침부터 여러 차례 술을 마시고 50여㎞를 운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인제군 한 국도의 교차로에서 정비 불량으로 보이는 11.5t 트럭이 신호를 위반하고 주행하는 것을 뒤쫓아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김 씨를 붙잡았다.

지난 5월 음주운전으로 적발돼 무면허 상태였던 김 씨는 이날도 혈중 알코올농도 0.122% 상태에서 운전한 것으로 조사됐다.

김 씨는 울산에서 자재를 싣고 출발해 양양에 도착, 하룻밤을 묵은 뒤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다시 운전석에 올랐다.

도중에 인제의 해장국집에 들러 또 술을 마신 것으로 확인됐다.

차 안에서도 반쯤 남은 500㎖ 소주병이 발견됐다.

음주나 졸음운전으로 인한 화물차 사고는 차량 덩치만큼이나 피해도 크다.

지난 8월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사부리 경부고속도로에서는 5t 화물트럭에서 공사장 작업용으로 쓰이는 가로 120㎝, 세로 50㎝ 크기의 철제 비계발판 70여 개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철판은 뒤따르던 차량 15대를 덮쳐 차체나 타이어가 무더기로 파손됐고, 일부는 중앙분리대를 넘어 맞은편 차선으로 떨어졌다.

이날 사고는 트럭 운전자 윤모(72) 씨가 졸음운전을 하다 앞차와의 충돌을 피하려고 급하게 핸들을 꺾는 바람에 일어났다.

화물차 음주 사고의 위험성과, 이를 엄하게 단죄하려는 사법부의 의지는 법원 판결에서도 엿볼 수 있다.

대구지법 의성지원은 만취 상태에서 도로를 역주행한 화물차 운전자 김모(55)씨에게 징역 6월을 선고했다.

범칙금 몇만 원과 벌점만 부과되던 난폭 운전자에게 실형을 선고한 첫 사례다.

1년 이하 징역이나 5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한 도로교통법 제151조 2항이 올 2월 시행된 이후 처음 적용된 것이다.

경찰청 통계를 보면 2013∼2015년 음주운전으로 목숨을 잃은 운전자나 차량 탑승자는 1천902명에 달한다.

부상자는 2013년 4만7천711명, 2014년 4만2천772명, 2015년 4만2천880명이다.

졸음운전 사고는 2013년 2천512건, 2014년 2천426건, 2015년 2천701건으로 집계됐다.

사망자는 2013년 121명, 2014년 130명, 2015년 108명, 부상자는 2013년 4천952명, 2014년 4천679명, 2015년 5천525명이었다.

화물차 대형 사고로 국민 안전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정부는 지난 7월 음주·졸음운전 방지를 위한 사업용 차량 교통안전 강화대책을 내놨지만,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 대책은 운수종사자가 4시간 이상 연속 운전하면 최소 30분의 휴식시간을 주고, 최근 5년간 상습 음주운전(3회 위반), 음주측정 거부 등으로 면허가 취소된 경우 자격시험 응시를 제한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교통사고 전문 한문철 변호사는 "4시간 운전, 30분 휴식 대책은 운전자가 직접 고용주를 신고하거나 누가 계속 감시해야만 실현 가능한 일"이라고 꼬집었다.

화물차 운전자들이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는 걸 막으려면 본인 노력과 함께 근무여건을 개선할 관련 법과 시설 정비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한 변호사는 "고속도로 휴게소나 졸음쉼터에서 술을 파는 행위는 음주운전과 똑같이 처벌하고, 졸음쉼터를 늘리고 시설도 확충해야 한다"며 "운전자들 역시 피로를 느낄 때 즉시 휴식을 취해야 한다.

졸음이 오는 걸 자각할 땐 이미 늦다"고 강조했다.

경찰 관계자는 "피로를 달래려고 마시는 한잔 술이 죽음에 이르는 사약이 될 수 있다"며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종합연합뉴스) 공병설 기자 ko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