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국회의사당 앞에 있는 4·19혁명의 중심지 기념비. 1960년 4월18일 고려대 학생 1000여명이 이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옛 국회의사당 앞에 있는 4·19혁명의 중심지 기념비. 1960년 4월18일 고려대 학생 1000여명이 이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내각책임제 1년 만에 실패

1950년대에 이승만 대통령이 야당과 대립했던 가장 큰 문제는 정부 형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중심제를 주장했지요. 하지만 야당은 국회에 많은 권한을 주는 내각책임제를 원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집권기에는 대통령 중심제를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4·19혁명 이후 권력을 잡은 야당은 주저하지 않고 내각책임제로 정부 형태를 바꿨지요. 하지만 내각책임제는 1년 만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5·16군사정변 이후 다시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었고 이 정부 형태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한국의 정부 형태로 대통령 책임제가 어울린다고 믿는 사람이 아직 많다는 의미입니다.

대통령 직선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1952년 부산에서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바꾸는 과정에서 무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인 대통령 직선제는 우리 국민의 큰 자산입니다. 1971년 유신 체제가 만들어지면서 몇 년 동안 대통령을 직접 뽑지 못했습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되찾기까지 우리 국민은 치열하게 투쟁해야 했지요. 민주화의 장엄한 승리라고 여겨지는 6·29선언의 주요 내용이 대통령 직선제의 부활인 것을 봐도 대통령 직선제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제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따르는 자유당과 끝까지 대립한 야당은 민주당이었습니다. 민주당은 1955년에 만들어졌습니다. 민주당 주요 인사는 신익희, 조병옥, 장면 등이었지요. 이들은 건국 과정에 이승만과 같은 길을 걷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중간에 이승만 대통령의 노선에 반대하며 갈라져 나간 사람들입니다.

고령의 이승만 대통령 승계 문제

1956년 제3대 대통령과 부통령선거에 자유당 후보로 이승만과 이기붕이 출마했습니다. 이승만은 이때 이미 80세를 넘긴 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유당에는 그를 대신할 사람이 없었지요. 정권이 민주당으로 넘어가면 내각책임제가 될 것이고 그러면 지난 8년 동안 이승만 대통령이 쌓아온 공든 탑이 다 무너질 판이었습니다.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이 당선되었습니다. 전과 같지는 못했지만 아직 그 인기가 남아 있었고 게다가 강력한 경쟁자였던 민주당의 신익희가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통령 후보였던 이기붕은 민주당 후보인 장면에게 졌습니다. 이기붕은 서울시장, 국방장관, 국회의장, 자유당 총재를 지낸, 이승만 대통령이 믿는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부통령선거에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부통령은 대통령에게 문제가 생겨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할 때 그 자리를 이어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통령도 절대 상대 당에 넘길 수 없는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4·19혁명 희생자 영정. 학생 시위로 시작됐기 때문에 희생자 중에 교복 입은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많이 띈다.
4·19혁명 희생자 영정. 학생 시위로 시작됐기 때문에 희생자 중에 교복 입은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많이 띈다.
1960년 제4대 대통령선거가 다가왔습니다. 이때도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다시 뽑히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습니다. 경쟁자였던 민주당의 조병옥 후보가 선거를 한 달 앞두고 미국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부통령선거가 문제였습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85세였습니다. 야당 후보가 부통령이 되었는데 고령인 대통령이 임기 중에 사망하면 정권이 고스란히 야당으로 넘어갈 판국이었습니다. 이기붕 세력은 부정 선거를 해서라도 부통령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습니다. 이기붕은 학생들이 야당의 선거 유세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는 등 부정을 저지르기 시작했지요.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2월28일 대구에서 시작되었고 이 시위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3월15일 선거 당일에는 본격적으로 부정이 저질러졌습니다. 세 사람씩 묶어 공개 투표를 하기도 했고 군대에서는 120%가 이승만 후보를 찍었다는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지요.

부정선거 항의 시위 번져

결국 이승만과 이기붕은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투표 결과에 국민은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3월15일 마산에서 부정 선거에 대한 항의 시위를 하던 중 김주열이라는 고등학생이 사망했습니다.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은 것이지요. 그런데 4월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시신이 바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는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4월18일 서울 국회의사당 앞에 고려대 학생 1000여명이 모여서 정부통령선거를 다시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다음날 4월19일에는 대학생, 중고등학생, 심지어는 초등학생까지 거리로 몰려나왔습니다. 4·19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글 =황인희 / 사진=윤상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