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270건 수사 중…용인 대학교수 부인 살인 등 해결
전문가 "대대적인 인력 투입해 현장서 새 단서 찾아야"

지난해 살인죄 공소시효를 폐지한 이른바 '태완이법'(형사소송법)이 시행되면서 장기 미제로 남은 살인사건이 해결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경기 용인에서 15년 전 발생한 대학교수 살인사건의 진범이 검거되는가 하면 전남 나주 드들강 여고생 살인사건 피의자도 재판을 받고 있다.

현재 전국 지방경찰청 미제 전담팀이 수사하고 있는 사건은 모두 270건으로, 전담팀 72명이 재수사를 벌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미 수사가 진행된 바 있는 장기 미제사건을 해결하려면, 수사자료 검토뿐 아니라 새로운 단서를 찾을 현장에 대대적인 인력을 투입해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지적한다.

◇ 태완이법 시행…장기 미제 살인 사건 '270건'
1999년 5월 20일 대구의 한 골목길에서 여섯 살짜리 김태완군이 괴한으로부터 황산테러를 당해 49일간 고통을 겪다가 끝내 숨졌다.

부모는 생업을 제쳐놓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은 채 공소시효는 만료됐다.

그러나 김군의 죽음은 또 다른 '태완이'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정치권은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내용의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했고, '태완이법'으로 불린 이 개정안은 지난해 7월 24일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모든 미제 살인사건의 공소시효가 폐지된 것은 아니다.

적용 대상이 '법 시행 이전에 발생한 범죄 중 아직 공소시효가 완성되지 않은 범죄'만으로 한정됐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 이미 공소시효가 완성된 태완군 사건은 태완이법을 적용받지 못한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모티브가 된 화성 연쇄살인사건, 실종된 지 11년 만에 유골로 발견된 대구 '개구리소년' 사건, 영화 '그놈 목소리'의 바탕이 된 이형호(당시 9세) 유괴·살인사건 등 이른바 3대 미제사건도 수사 당국의 손을 떠났다.

태완이법이 적용되는 사건은 2008년 8월 1일 오전 0시 이후 발생한 살인사건으로, 전국적으로 270건에 달한다.

주요 미제사건으로는 경기 화성 여대생 살인사건, 포천 여중생 살인사건, 대전 국민은행 강도살인 사건, 강원 양구 전당포 노부부 살인 사건 등이 있다.

화성 여대생 살인 사건은 2004년 대학생 노모(당시 21세)씨가 성폭행 당한뒤 살해된 사건이다.

그해 10월 27일 오후 8시 35분께 경기 화성시 와우리공단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한 노씨는 이후 행방 불명됐다가 46일 만에 이곳에서 5㎞가량 떨어진 정남면 보통리 야산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경찰은 당시 노씨의 바지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체액을 채취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로 보냈지만 샘플에 국과수 분석요원의 DNA가 섞여 오염되면서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대전 국민은행 강도살인 사건은 2001년 12월 21일 38구경 권총을 소지한 강도 2명이 국민은행 현금 수송차량에서 3억원이 든 가방을 빼앗으면서 직원을 총으로 쏴 살해한 사건이다.

범행에 이용된 차량은 현장에서 130m가량 떨어진 빌딩 주차장에서 발견됐지만 경찰이 이후 강도들의 행적을 파악하지 못했다.

2005년 8월 14일 강원 양구군 한 전당포에서 발생한 노부부 피살사건도 피 묻은 족적 외엔 단서가 없는 상태이며, 2004년 2월 8일 경기 포천의 한 배수로에서 발견된 여중생(당시 15세) 살인사건도 현장 근처에 CC(폐쇄회로)TV가 없는 데다 단서나 제보도 없어 답보상태에서 미제로 분류돼 있다.

◇ 장기 미제 살인사건 해결 '성과'
태완이법 시행 이후 경찰에 장기 미제수사 전담팀이 생기면서, 미제사건은 더 이상 캐비닛 속에서 '콜드 케이스'로 마냥 방치되지 않는다.

최근 경찰은 2건의 주요 장기 미제 살인사건을 해결해 다른 미제사건의 실마리를 풀 희망을 보여줬다.

15년 전 경기 용인의 한 단독주택에서 발생한 대학교수 부인 살인사건의 진범이 경찰에 검거됐다.

옛 형사소송법대로라면 이미 지난 6월 공소시효가 만료됐을 이 사건은 태완이법 적용을 받아 공소시효가 폐지된 덕분에 진범에게 죄를 물을 수 있게 됐다.

경기 용인동부경찰서는 강도살인 혐의로 김모(52)씨를 입건, 조만간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송치할 예정이다.

김씨는 2001년 6월 28일 오전 4시께 경기도 용인시 A(당시 55세·대학교수)씨의 단독주택에 B(52)씨와 함께 침입, A씨 부인(당시 54세)을 흉기로 찔러 살해하고, A씨에게 중상을 입힌 뒤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

김씨는 이미 다른 범죄로 교도소에 수감된 상태다.

15년 전 경찰은 형사 27명으로 구성된 전담팀을 꾸려, 사건 시간대 인근 기지국에 통화기록이 남은 사람과 피해자 주변인, 동일 수법 전과자 등 5천여명을 대상으로 수사했으나 범인을 잡지 못했다.

사건 발생 당시 용인경찰서 형사 팀원(경장)이던 박장호 현 용인동부서 형사 팀장(경위)은 지난해 다시 이 사건 수사에 착수했다.

박 팀장 등은 과거 수사 대상자를 일일이 확인하던 중 김씨가 과거 경찰에 한 진술과 다른 진술을 한 점에 주목, 공범 B씨에게 출석요구서를 보냈지만 B씨는 가족에게 범행을 자백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B씨 자백을 근거로 김씨를 추궁하던 경찰은 김씨로부터 자백을 받아냈다.

전남 나주경찰서는 지난해 10월 나주 드들강 여고생 살인사건 피의자 김모(39)씨를 입건해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송치했다.

김씨는 2001년 2월 A(당시 17세)양을 성폭행한 뒤 목을 조르고 물에 빠뜨려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살인사건은 미제로 분류됐으나 2012년 대검찰청 유전자 감식 결과 피해자 체내에서 검출된 유전자가 강도살인죄로 목포교도소에 복역 중인 무기수 김씨의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광주지검 목포지청은 뒤늦게 김씨를 이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하고 수사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했다.

경찰은 지난해 3월 전담팀을 구성, 재수사에 착수해 김씨를 다시 입건, 기소의견으로 송치한 것이다.

검찰은 경찰 수사기록을 넘겨받아 김씨를 올해 8월 기소했고, 같은달 31일 김씨에 대한 첫 재판이 열렸다.

김씨는 아직도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어 재판 결과는 예상할 수 없지만, 드들강 여고생 살인사건은 태완이법 시행으로 살인죄 공소시효가 폐지된 후 경찰이 해결한 첫 사례로 꼽힌다.

◇ 미제 전담 수사팀 어떻게 운영되나
경찰청은 미제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전국 지방경찰청에 편제된 '장기 미제사건 전담수사팀' 72명을 지정, 단계별 수사지침을 하달했다.

경찰이 마련한 수사지침은 집중 수사체제 운영(발생∼1년), 관할서 전담반 체제 운영(1∼5년), 지방청 미제전담팀 수사·관리(5년 초과) 등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이에 따라 사건 발생 후 1년간은 수사본부를 꾸려 광역수사대, 과학수사팀 등 분야별 전문수사 인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해 범인의 조기 검거에 나선다.

1년이 지나도 사건이 해결되지 않으면 수사본부는 해체되고 경찰서 전담반이 수사를 맡는다.

사건 발생 후 5년이 지나면 미제전담팀이 아예 관할 경찰서의 사건기록과 증거물을 넘겨받아 계속 수사를 하기로 했다.

이후 10년 이상 해결이 안 되면 추가 수사 여부를 심의할 수 있다.

수사의 진전이 없고 유력한 단서나 증거가 더는 발견되지 않고 앞으로도 해결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면 수사 중지 대상으로 지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경찰은 장기미제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수사활동을 중지하고 사건기록·증거물 관리·분석에 주력한다.

단 관련 증거나 첩보, 목격자 등 중요한 단서가 발견되면 언제든 수사를 재개하는 방식이다.

이같은 지침에 따라 각 지방청 산하 장기 미제 수사팀 72명은 주로 사건기록을 재검토하면서 새로운 단서를 찾는데 주력하고 있다.

아울러 사건 현장을 다시 방문하고, 주민들을 탐문해 새로운 수사 첩보를 수집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10년 넘은 장기 미제사건이다 보니 유족이나 참고인들이 반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아 재수사가 여의치 않다는 게 전담팀의 말이다.

과거 가족을 잃은 아픔을 잊고 생활에 적응하던 유족들은 경찰이 다시 찾아와 사건에 관해 묻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간이 많이 흐르다 보니 참고인이 이미 사망하거나 노환 또는 질병 등으로 증언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한 전담팀 형사는 "장기 미제사건을 재수사하는 과정에서 가장 힘든 점은 바로 유족과 접촉하는 것"이라며 "과거의 아픈 기억을 다시 꺼내야 하므로 간혹 반감을 심하게 나타내는 분도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형사는 "미제사건이라고 하면, 이미 선배 형사들이 수사본부까지 차려 샅샅이 수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며 "결국 사건을 해결하려면 선배의 실수, 동료의 과오를 찾아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심적인 부담도 만만치 않다"고 털어놨다.

박근우 전북지방경찰청 미제전담수사팀장은 "새로운 증거가 나오거나 사건 관련자들이 입을 열어야 미제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 보니 유가족, 목격자 등을 만나 새로운 정황이나 진술이 나오는지 수시로 체크하고 있다"며 "막막하지만, 현재로선 이런 방법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미제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선 수사팀에 충분한 인력이 보강돼야 하고, 경찰 조직 내에서도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기보단 장기적인 수사과정을 지원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 경기북부지방경찰청 미제수사팀의 경우 정원이 4명인데도 현재 3명밖에 배정되지 않았다.

매일 발생하는 형사사건에 투입되지 않고 오로지 미제사건에만 몰두할 수 있는 충분한 인력이 있어야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고 전문가는 조언한다.

이순래 원광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아무래도 미제사건을 해결하려면 충분한 인력이 필요하다"며 "미제사건으로 남았다는 것은 이미 사건 발생 당시 할 수 있는 수사는 거의 다 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해서 과거 수사기록을 들여다보는 것보단 새로운 단서를 찾아 현장으로 나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 지방청 관계자는 "10년 넘은 미제 사건을 맡은 수사팀에 단기적인 성과를 요구하는 것보단 장기적으로 수사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해민, 임채두, 최재훈, 이재현, 임기창, 김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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