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은 2001년 300억원을 카이스트에 기부한 데 이어 2014년 215억원을 또다시 쾌척했다.

정 전 회장은 반도체 관련 미래산업을 창업하고 벤처기업 10여개에 투자해 '벤처업계 대부'로 불렸다. 그리고 2001년 아무 혈연 관계가 없는 후임자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고 물러났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215억원을 쾌척할 당시 협약식에 참석한 한 카이스트 교수의 전언에 따르면 정 전 회장은 "돈과의 싸움에서 내가 이겼다"고 담담히 말했다고 한다. 협약식 전날 밤까지도 번민 속에 사로잡혔고, 이 싸움에서 이기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고 한다.

정 전 회장이 기부금을 써달라고 지정한 분야는 미래전략과 뇌과학이다. 카이스트는 그 돈으로 국내 최초의 융합학과인 바이오 및 뇌공학과를 개설했다.

최근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의 연구재단 사재 출연도 궤를 같이 한다. 생명과학 인재육성에 써달라며 자신의 주식 3000억원을 기부했다. 서 회장은 아모레퍼시픽 사업과 관련된 연구는 단 한건도 하지 말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화장품 사업과 무관하게 순수 생명과학 분야에서 연구하는 신진 과학자를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정문술과 서경배의 기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크게 두가지다. 자신을 키워준 사회에 자신의 전부를 환원하겠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실천 의지와 기초과학과 관련 인재 양성에 그 돈을 사용하겠다는 생각이다.

지난 5월 일본의 기초과학 연구기관인 이화학연구소(니켄)을 방문했을 때다. 연구소 소개를 맡은 홍보담당자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복한 고민 한토막을 들려줬다. 스크린에는 원소주기율표가 떠올랐고, 113번 자리만 이름없이 특별한 색깔로 부각돼 있었다.

이 연구소에 소속된 규슈(九州)대 모리타 고스케(森田浩介) 교수 연구팀이 수백조번의 실험과 실패 끝에 발견한 새 원소가 들어갈 자리였다. 지금 그 이름을 짓는 과정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한 달 뒤 국제순수응용화학연합(IUPAC)은 113번 합성 원소를 발견한 일본 연구자들의 요구대로 '니호니움'(nihonium·원소기호 Nh)이라고 명명했다고 발표했다. 니호니움은 이화학연구소 연구진이 발견자로서 권리를 행사해 일본의 자국어 발음 '니혼'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21명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기초과학 강국 일본의 한 단면이다.

정문술과 서경배는 대한민국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가장 시급하고 눈앞에 당면한 과제가 바로 기초과학 발전과 관련 인재 육성이라고 본 것 같다. 그리고 이들의 기부는 아직까지 이를 깨닫지 못하는 우리를 향한 소리없는 외침일 수도 있다.

변관열 한경닷컴 산업경제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