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1999년부터 2003년까지 행해진 휴먼게놈프로젝트에서 첫 번째 도출된 게놈지도 작성에 소요된 비용은 5억달러 이상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이 비용은 2006년에 2500만달러 정도로 줄었고, 그 후 10년이 지난 지금 99달러에 유전자 검사를 제공하는 ‘23앤드미’라는 업체가 등장했다. 이 회사는 간단한 세포 샘플을 분석해 90개 이상의 질병 발병 가능성을 추정하고 조상 찾기 서비스와 함께 친척 찾기 기능도 제공한다. 그 결과 100만명이 넘는 회원과 5000만달러 이상의 투자를 유치하며 의료산업의 미래혁신을 예고하고 있다. 이를 목격한 보스턴컨설팅의 필립 에번스는 개별 DNA 데이터가 임상의료 데이터, 인터넷, 모바일, 사물인터넷(IoT), 웨어러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한 다양한 생활 데이터 등과 결합되면서 가져올 근본적인 혁신에 대해 설파한 바 있다. 특히 보다 많은 사람의 유전자 정보가 모이면 선제적 의료 진단 및 처방의 정확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게 됨을 짐작할 수 있다.

갈 길 먼 의료 선진화…"고품질 빅데이터 확보·플랫폼 역량 키워라"
데이터 열풍이 전 세계 의료산업에 몰아닥치고 있다. IBM의 인공지능 ‘왓슨’은 암진단 정확도가 96%에 달해 전문의를 능가하고 있다는 평가이고 제약업계는 신약 개발 및 마케팅에 데이터 기반 프로세스를 도입하고 있다. 각종 약물 개발 시 부작용 및 위험도를 줄이고 SNS 데이터를 분석해 특정 기능의 신약에 대한 수요를 판단해 비용을 줄이고 매출을 향상하는 것이다. 전 세계 정부들도 팔을 걷어붙였다. 미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2015년 1월에 정밀의료추진계획(PMI)을 발표하고 2억1500만달러를 투자한다고 공표해 의학계의 패러다임 변화를 예고했다. 영국은 2013년 보건의료 빅데이터 통합센터(HSCIC)를 설립해 2조원의 예산을 투입하고 10만명의 유전자 정보를 분석한다는 목표를 위해 ‘지노믹스 잉글랜드’라는 국영기업을 설립했다. 일본은 의료 빅데이터 정비 프로젝트를 추진해 역시 맞춤형 진료와 의료서비스 개선에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한국도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미래창조과학부,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이 의료 빅데이터 및 스마트 헬스 등을 전략적으로 육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전 세계 의료 빅데이터 시장은 2023년 629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 중 데이터 저장 및 통합이 346억달러, 데이터 해석 및 분석이 34억달러, 시각화 및 빅데이터 분야가 248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해석 및 분석 분야 시장 성장률이 38%로 가장 높을 것으로 예상됐다. 즉, 의료 빅데이터가 어느 정도 수집된 뒤에는 이를 분석·가공해 고품질의 의료서비스에 필요한 지식으로 전환하는 서비스가 부가가치를 많이 창출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데이터에 기반한 의료서비스의 질적 향상에는 크게 개인 고유의 유전자 데이터, 병원 등 의료기관에 보관되는 각종 의료 데이터, 그리고 취미 건강 여가 사회관계 등 생활 전반의 기록인 라이프 로그 데이터의 세 가지가 필요하다. 이들 정보를 함께 분석하면서 다양한 유형을 발견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개개인에게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스마트헬스와 정밀의료의 비전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다양한 과제가 산적해 있다.

먼저 의료산업에서의 개인정보 보호 문제는 특히 까다롭다. 대부분 국가에서 임상실험 시 어떤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는지, 데이터 접근 권한을 누가 갖는지, 어떤 종류의 환자 동의를 얻어야 하는지에 대해 법적 제한이 매우 엄격하다. 이런 데이터를 데이터 과학자가 활용해 분석할 수 있으려면 근본적인 법체계의 개편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당장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축적한 1조5000억건의 데이터를 활용하는 구상에 개인정보 보호와 의료 영리화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의료기관 내부에서도 데이터에 대한 관리권한체계를 수립하는 일은 큰 과제가 될 수 있다. 또 양질의 데이터 과학자가 부족할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에서 의료 분야에서 활동할 데이터 과학자를 확보하는 것도 근본적인 이슈로 제기되고 있다.

보다 근본적인 조건인 양질의 데이터를 확보하는 것도 당면한 과제다. 기본적으로 전자의무기록(EMR/EHR)의 표준화가 선행돼야 하고, 데이터 생성·관리 과정에 품질향상기법과 자동생산기법을 적용해 저비용·고품질의 데이터베이스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한국 의료계에서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이 표준화 대안들을 제시하고 개인정보보호법, 유전체관련법 등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

반면 라이프 로그 데이터는 의료계 범위를 벗어나 글로벌 정보기술(IT) 플랫폼 업체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 이를 잘 아는 플랫폼 업체들은 건강 관련 라이프 로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거꾸로 의료 데이터와의 접목을 통해 의료 플랫폼을 장악하려는 전략을 시도하고 있다. 구글은 구글핏 플랫폼을 중심으로 라이프 로그 데이터를 수집하면서 구글 글라스와 전자의무기록까지 연동한다는 계획이고, 애플 역시 헬스킷을 발표해 아이폰 애플워치와의 연동을 바탕으로 의료플랫폼 선점 경쟁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의료계와 플랫폼 업체들 간 협업이 어떻게 이뤄지느냐에 따라 스마트헬스·정밀의료 비전을 구현하는 양상이 크게 영향받을 전망이다.

이 과정에서 과거 플랫폼 업체를 중심으로 융합이 성사된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통신산업은 모바일 혁명이 이뤄지면서 통신사로부터 플랫폼 업체로 주도권이 넘어간 지 오래다. 미디어산업은 콘텐츠 사업자와 플랫폼 사업자 간 각자의 역할을 어느 정도 나눠 공존하는 모양새인데 이 과정에서 넷플릭스, 허핑턴포스트 등과 같이 과감하고 혁신적인 사업모델을 통해 뉴미디어의 강자로 등극한 사업자도 있고, 몰락한 전통 미디어 기업들도 무수히 많다. 이런 점에서 의료산업 상황은 자동차산업 상황과 비슷한 점이 있다. 독자적인 플랫폼 역량이 낮고 시장이 파편화돼 있으나 고유 영역의 경쟁 우위는 매우 높아 플랫폼 업체들과 대치하며 미래를 고민하는 모양새다. 결국 의료산업 내부 협업을 통해 표준화와 효율화를 추진해야 플랫폼 업체들과의 공생적인 관계 모색 과정에서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데이터에 기반한 의료산업 선진화는 지금까지 보아온 다양한 산업들의 융합과정보다 한층 더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는 기술적·법률적·경제적·문화적 걸림돌이 산적해 있다. 글로벌 의료시장에서 한국 의료업계가 경쟁력을 가지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투명한 리더십과 의료산업계의 전향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자세가 절실하다.

■ 美 파트너스 헬스케어 등 해외 사례 살펴보니…

파트너스 헬스케어는 매사추세츠병원, 하버드 의대 등 미국 동부 보스턴 인근 다수의 의료기관이 연계된 비영리 단체로 소속 의료기관들의 금융, 운영, 임상분석시스템을 통합한 시스템을 개발·운영한다.

파트너스 헬스케어는 환자추론문서(QPID)라는 전자의무기록(EHR)용 지식시스템을 개발했는데 5000명이 넘는 의료진에 의해 활용되고 있으며 전자의무기록의 활용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인 사례로 꼽힌다.

익스프레스 스크립츠는 보험약제관리기업(PBM)으로 연간 15억건이 넘는 조제 정보를 관리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10페타바이트(petabytes)라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분석·활용해 소비자 행동양식 변화를 이끌어낸다.

예를 들어 처방을 받아 구입한 약을 제대로 복용하지 않는 사례를 줄이기 위해 스크린RX(ScreenRX)라는 시스템을 개발해 의료기록, 처방전, 기존 데이터 등을 함께 분석한다. 이를 통해 소비자가 제대로 약을 복용할 것인지 예측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내 복용을 상기시키거나 저렴하게 약을 보충하는 방법을 안내하는 등의 관리를 해 약제 낭비를 줄이고 소비자 건강을 증진하는 편익을 제공하고 있다.

오정석 < 서울대 경영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