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2월 서산 간척사업 현장을 찾은 정주영 명예회장.
1984년 2월 서산 간척사업 현장을 찾은 정주영 명예회장.
서산이라는 지명이 역사서에 처음 등장한 건 고려 충렬왕 때인 1284년이다. 삼한 시대에는 마한에 속한 치리국국(致利鞠國)이 있었던 곳이 지금의 서산시 지곡면 일대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부성군으로 불리다가 고려 충렬왕 때 서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당시 충렬왕은 고려 시대 무신이자 외교관이던 정인경이 나라에 세운 큰 공을 기려 ‘상서로운(瑞) 땅’이라는 뜻의 서산(瑞山)이라는 지명을 하사했다. 정인경은 서산을 본관으로 하는 대표적인 성씨인 서산 정씨의 시조 정신보의 아들이기도 하다.

이후 서산군은 1308년 서주목으로 승격했다가 불과 2년 만에 서령부로 강등되는 아픔을 겪는다. 이후에도 서산은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덟 차례 고을의 격상과 격하를 반복한다. 지역 주민의 모반이나 대역죄가 이유였다. 서산이 명당인 동시에 기(氣)가 센 고을이어서 모반 등의 부침이 심했다는 것이 풍수지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충남 서해안에 돌출한 태안반도에 자리 잡은 서산은 일찍부터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해 대륙 문화를 들여오는 역할을 맡았다.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에서 보듯이 중국에서 들여온 불교 문화가 활짝 핀 곳이 서산이다. 서산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의 세곡을 서울로 운송하는 조운선이 통과하는 중요한 지리적 요충지였다. 이 때문에 왜구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79년부터 1995년까지 추진한 서산 천수만 간척지 사업은 서해안의 지도를 바꾼 획기적인 사업이었다. 당시 정 회장은 방조제를 쌓기 위해 길이 322m의 유조선을 가라앉혀 물줄기 힘을 줄이는 이른바 ‘정주영 공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서울 여의도 면적의 33배에 달하는 1억5537만㎡의 간척지가 조성돼 지금도 농장과 목초지로 활용되고 있다. 정 회장은 이곳에서 기른 소 1001마리를 1998년 트럭에 싣고 두 차례에 걸쳐 방북하기도 했다.

서산=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