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정희 기자 ljh994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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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금융회사 홍보팀에서 일하는 김 차장(44)은 여름휴가를 반납했다. 오는 9월 말까지 주말에는 골프 약속, 평일에는 술자리 약속이 빼곡히 잡혀 있어서다. 그는 “토요일은 물론 일요일도 골프 약속이 잡혀 휴일이 없다”며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기자들을 만나기 쉽지 않은 만큼 그 전에 조금이라도 더 자리를 같이해야 한다는 생각”이라며 “지금 비상이 걸리지 않은 홍보팀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차장이 속한 팀에서는 “연간 단위로 책정한 홍보 예산이 올해는 9월까지 동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다음달 말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홍보부서에서 근무하는 ‘김과장, 이대리’들의 마음이 바쁘다. 법이 시행되면 업무상 주로 상대하는 기자에게 식사 3만원, 선물 5만원, 경조사비 10만원 이상을 지급할 수 없어서다. 기자들과 만나 원하는 기사 게재를 요청하던 업무 방식도 부정청탁으로 간주될 수 있어 마음이 복잡하다. 반면 이참에 ‘업계 관행’이라며 용인돼온 홍보 문화를 개선할 기회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법 시행을 앞두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각사 홍보업무 담당자의 얘기를 들어봤다.

홍보 전략 수정 어떻게 … ‘비상’

공연기획사에 근무하는 김 대리(35)는 최근 법률자문을 받고 있다. 문화부 기자들의 취재를 위해 제공하던 ‘공연 초대권’을 합법적으로 지급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다. 법안에 따르면 금액을 기재하지 않은 공연 초대권도 판매 가격이 5만원을 넘으면 ‘뇌물’ 범주에 들어간다.

해외 유명 연주자나 오케스트라 초청 클래식 공연은 가장 비싼 좌석이 30만~40만원 선. 김 대리는 “클래식 공연은 유료 관객으로 객석을 꽉 채우는 것이 어차피 불가능하다”며 “남는 관람권을 초대권으로 뿌리고 싶어도 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답답하다”고 한탄했다.

한 정부부처 대변인실에 근무하는 최 과장(42)도 비슷한 처지다. 특정 언론사에 기획기사 게재를 부탁하는 행위가 부정 청탁으로 간주될 수 있어서다. 최 과장의 부처는 다른 부처보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기자의 관심도 적은 편이다. 그는 “지금까지 인맥을 동원해 기사 게재를 부탁하거나, 일부 언론사를 택해 기획기사를 내는 방식으로 약점을 극복해왔다”며 “그 과정에서 친해진 기자에겐 고맙다는 의미로 밥도 사고 했는데 이제 그럴 수 없으니 난감하다”고 토로했다.

국내 한 전자업체의 홍보담당 임원 정모씨는 매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세계최대전자쇼(CES)’ 등 각종 해외박람회 취재 지원을 놓고 머리가 아프다. 자사 최신 제품을 홍보하고 최고경영자(CEO)의 경영전략을 소개하는 자리인 만큼 기자 초청이 필수지만 방법이 마땅치 않아서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 이 같은 행사에 기자를 초청하려면 모든 언론사에 동등한 출장 기회를 줘야 한다.

하지만 이 전자업체에 출입 등록을 한 언론사는 500여곳에 달한다. 모두 행사에 참석하겠다고 하면 전세기를 2~3대 띄워야 할 판이다. 정씨는 “현실적으로 매체에 따라 홍보효과가 크게 갈리는 상황에서 복권처럼 추첨해 뽑으라는 것인지 정말 고민된다”고 말했다.

골프 대신 등산…신(新) 풍속도

발빠르게 기자들과 친목을 쌓을 만한 새로운 방법을 물색 중인 이들도 있다. 한 대기업 홍보 부서에 근무하는 팀원들은 골프 대신 등산을 가자는 B임원 때문에 죽을 맛이다. 주말마다 산행에 동참해야 하는 데다 그의 입맛에 맞는 등산 코스를 찾기 위해 사전답사를 다녀야 하는 수고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팀원들 사이에선 “임원 혼자 나가서 골프 치고 오는 게 우리 입장에서는 편했다”며 “김영란법으로 접대비가 줄어드는 만큼 몸으로 때워야 할 판”이라는 말도 나온다.

대기업 홍보팀에 근무하는 김 차장은 요즘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맛집 리스트를 만들고 있다. 술은 조금 마시면서 요리 하나당 2만~3만원에 즐길 수 있는 타이 음식, 비싸지 않은 이탈리안 레스토랑 등이다. 그는 “점심식사를 하듯 가볍게 저녁을 먹으면서 도란도란 대화하는 게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2차는 술집 대신 카페로 가면 건강도 챙기고, 다이어트도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엇갈리는 득실 계산

홍보담당 부서 위상에 대한 걱정도 만만치 않다. 대기업에서 홍보를 담당하는 최 부장은 지난해 임원 승진에서 누락돼 올해 반드시 승진해야 한다. 하지만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홍보부서 조직 및 예산 축소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몇 년째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재무부서에서 ‘법을 지켜야 한다’며 예산을 깎으려 들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최 부장은 “예산과 조직이 축소된다는 건 홍보임원 자리도 줄어든다는 뜻”이라며 울상을 지었다. 지난해 마케팅부문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거절한 그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

술자리 등에서 기자 인맥을 쌓을 수 없는 만큼 10년 이상 해당 업무를 해온 ‘홍보맨’의 몸값이 올라갈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서울의 한 중견기업 홍보팀에서 근무하는 강 팀장(40)은 “법 시행으로 술자리가 줄어들면 자연스레 홍보업무 관련 진입장벽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홍보담당자 사이에선 “부장급 홍보담당자의 몸값이 오를 것” “골프, 식사 접대가 사라진 자리를 ‘학연’ ‘지연’으로 채울 능력자가 필요할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유통업체 홍보팀에서 근무하는 공 차장도 김영란법 시행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는 홍보업무를 시작한 이후 1주일에 최소 네 번 이상 출입기자와 저녁식사를 해왔다. 결국 지난해 건강검진에선 간 수치가 높으니 술을 끊으라는 경고까지 들었다. 그는 “법이 시행되면 1차에서 가볍게 저녁만 먹고 헤어지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될 것 같아 좋다”고 말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