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포폰’(차명 휴대폰)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조직폭력배 등과 같은 범죄자들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2010년 이후 스마트폰이 확산되면서 수요층이 두터워졌다. 개인용 컴퓨터(PC)와 다름없는 스마트폰에서 개인정보가 새어나갈 것이란 우려가 커지면서다. 주식 투자자와 기업 임원, 각종 선거 관계자 등 다양한 사람이 혹시 모를 수 있는 사기관의 조사에 대비하거나 사생활, 비밀을 숨기기 위해 대포폰을 찾기 시작했다.
[커지는 대포폰 시장] "쉿!" 은밀한 통화의 유혹…선거관계자·기업 임원도 찾는다
갈수록 늘어나는 대포폰 수요는 선불폰으로 충당되고 있다. 선불폰은 일반 후불 휴대폰과 달리 통신비를 미리 지급하고 사용하는 것으로 알뜰폰 사업자가 주로 개통한다. 상당수는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명의가 도용돼 대포폰으로 둔갑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알뜰폰 사업자 허점 악용

29일 경찰과 통신업계에 따르면 전체 39개 알뜰폰 사업자(별정 통신사)를 통해 개통된 선불폰은 250만8863대(올해 5월 말)로 2011년 말(14만4767대)과 비교해 16배 급증했다. 알뜰폰 사업자는 2013년 이동통신 3사(SK텔레콤, KT, LG유플러스)의 개통 대수를 제치고 선불폰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미래창조과학부가 대포폰 명의도용을 막기 위해 이통 3사에 대한 본인 인증 절차를 강화한 시기다.

알뜰폰 사업자는 선불폰 분야에서 이통 3사와 격차를 갈수록 벌리고 있다. 2013년 이후 이통 3사의 선불폰 개통 수는 ‘반 토막’이 난 반면 알뜰폰 사업자의 개통 수는 2.5배 늘었다.

선불폰은 주로 외국인 관광객과 국내 체류 외국인, 휴대폰 이용이 많지 않은 학생, 노인 등이 사용한다. 이들의 수요가 늘어난 면도 있지만 상당수는 외국인 관광객 명의를 도용한 대포폰이라는 게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대포폰 상당수는 알뜰폰 사업자를 통해 개통된 외국인 명의 선불폰으로 파악된다. 외국인 여권 사본만으로 다수의 대포폰이 복제되고 있다. 불법 대포폰업자들은 알뜰폰 사업자가 선불폰 개통을 신청한 외국인의 입국정보만 조회 가능하다는 점을 악용하고 있다. 하나의 명의로 알뜰폰 사업자 39곳에 중복 가입할 수 있다. 한국알뜰폰사업자협회 관계자는 “가입자가 다른 통신사에서 선불폰을 몇 개나 개통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며 “알뜰폰 사업자 간 가입자에 대한 정보 공유가 없어 명의 1개만 도용해도 39개 대포폰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대포폰 불법 유통업자들은 여행 가이드를 통해 외국인 관광객 여권 사본을 빼내 명의를 도용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가이드는 호텔 숙박 신청 시 필요하다고 여권을 회수한 뒤 사진을 찍어 돈을 받고 명의를 판다”며 “알뜰폰 사업자 대리점이 다단계 형태로 운영되거나 잠깐 개통만 하고 폐업하는 식으로 불투명하게 운영된다는 점도 대포폰 시장을 키우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한 통신업계 관계자는 “전체 선불폰 시장의 최소 10%는 대포폰으로 추정된다”며 “대포폰으로 둔갑한 선불폰 가격을 35만원 정도로 잡아도 시장 규모가 최소 1000억원 이상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겉도는 대포폰 근절책

대포폰은 사회 곳곳에 광범위하게 스며들고 있다. 불법 유흥업소 운영자와 불법 대부업자, 주가조작 세력 등에겐 필수품으로 통한다. 일부 기업에서도 대포폰을 암암리에 쓰고 있다. 비자금 조성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강현구 롯데홈쇼핑 대표와 일부 직원들도 케이블 채널 사업권 인허가 업무를 맡으면서 대포폰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선거 기간에도 대포폰 수요가 급증한다. 사전 선거운동 등을 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한 생산자단체 회장도 지난해 말 대포폰을 이용해 불법 선거운동을 한 사실이 검찰 수사에서 확인됐다. 그는 외국인 명의의 대포폰으로 측근과 사전 선거 대책을 논의하거나 대의원들에게 지지 호소 문자를 보냈다. 한 휴대폰 판매업자는 “각종 선거 기간에는 대량으로 대포폰을 구매하는 사람들도 있다”며 “일반인도 개인적인 이유에서 대포폰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경찰은 외국인 관광객 명의를 빼낸 브로커와 대포폰 유통업자 단속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 13일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제주를 찾은 중국인 관광객 340여명의 여권 복사본으로 대포폰 유심 3000여개를 제작해 판매한 대포폰 업자들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지난 4월 서울 강남경찰서도 이 같은 방식으로 대포폰 1900대를 유통한 일당을 붙잡았다.

대포폰 근절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미래부 방송통신위원회 등 관계당국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말한다. 미래부 관계자는 “미국 일본 등 대부분 국가는 명의 없이 선불폰을 이용하도록 한 뒤 범죄가 발생하면 책임을 묻고 있다”며 “개통이나 이용을 까다롭게 규제하고 있지만 모든 대포폰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경찰 관계자는 “대포폰 명의자가 외국인이면 국내에 없는 경우가 많아 초기 수사에 어려움을 겪는다”며 “제도 허점을 노린 대포폰 양산을 막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상용 기자 yourpenc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