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도시 이야기-강화군] 연산군·광해군의 유배지…병인·신미양요 아픔도 서려
강화도와 교동도 등 강화군은 조선시대 광해군과 연산군 등 폐주(廢主)를 비롯해 수많은 죄인을 유배한 장소였다. 수도 한양과 가까워 요주의 인물 감시가 수월한 데다 강화와 육지 사이의 조류가 워낙 거세 특정 시간에 큰 배를 이용해야만 강화를 빠져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때 몽골의 침입을 피해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긴 것도 물살 탓에 육지에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서해에서 한강 하구로 진입하는 길목에 있는 지형 탓에 강화군은 구한말 전쟁의 포화가 끊이지 않았다. 1866년 프랑스 군함이 침략한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국 군함이 쳐들어온 신미양요가 일어난 곳도 모두 강화도다.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에 침입해 포격을 벌인 사건을 계기로 이듬해 조선과 일본은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강화군은 강화산성이 둘러싼 강화읍을 제외하면 도로 인프라가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아 이렇다 할 마을조차 없었다. 강화 주민 중 상당수는 6·25전쟁이 터졌을 때도 전쟁 발발 소식을 한참 동안 듣지 못했을 정도였다. 육지를 잇는 교통수단은 배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1970년 1월 왕복 2차선의 강화교가 완공된 이후에서야 강화는 비로소 육지와 연결됐다. 1995년에는 강화도와 경기 김포를 잇는 왕복 4차선의 강화대교가 개통했다. 2001년에는 강화군 동남쪽 길상면 초지리와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를 잇는 초지대교가 개통했다. 육지와의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강화를 찾는 관광객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동막해수욕장 등 과거 초가집만 있던 강화도 남쪽 지역은 관광객들을 위한 고급 펜션들이 들어섰다.

옛 도심도 급변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강화읍에 있었던 소규모 버스터미널은 1995년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유동인구가 늘고 버스 노선이 확충되면서 도심은 확장됐다.

강화=고윤상 기자 k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