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취 진동하는 2만㎡ 축사 일주일에 1~2번 청소…"소똥 치우는 일 싫어"
외발 손수레 끄는 중노동에 손톱 닳고 손바닥 굳은살, 다리엔 수술자국

19년 동안 무슨 일을 했느냐는 경찰의 질문에 '만득이' 고모(47)씨는 입을 열지 않았다.

어제 무슨 일을 했느냐는 얘기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19년간 고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경찰에 발견돼 가까스로 지옥같은 축사생활에서 벗어난 고씨는 지적 장애 2급이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니 감정을 표현할 수도 없었고,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농장에서 무슨 일을 했나요"라는 질문으로는 고씨의 대답을 들을 수 없다.

"소똥을 치웠나요", "소 사료는 줬나요"라는 식으로 질문해야 '예', '아니요'라는 단답형 대답을 하는 게 전부라고 한다.

이렇다보니 경찰도 축사에서 강제노역했던 고씨의 노동 강도가 어땠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다.

다만 한우·젖소 사육 농가의 특성상 고씨의 하루 일과가 동트기 직전부터 시작된다는 짐작은 가능하다.

소 사료를 주는 것은 물론 축사 청소도 해야 하다 보니 이른 아침부터 일이 시작된다.

농장주인 김씨 부부가 키우는 젖소와 한우가 40여마리나 되다 보니 이른 아침부터 일해도 밤 느지막하게 일을 끝내는 경우가 다반사다.

사료 말고도 김씨가 베어다 놓은 풀을 일일이 사료통에 넣어줘야 한다.

겨울에는 볏짚을 먹이지만 이때를 제외하고는 풀을 줘야 살이 오른다.

축사가 2만㎡에 달하다 보니 아침 저녁으로 풀과 사료를 운반하는 것만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다.

밤낮으로 외발 손수레와 쇠스랑을 쥐고 산 그의 손바닥에는 굳은살로 가득하다.

양손의 손톱은 닳아 없어진 상태다.

그의 다리에는 수술 자국도 있다.

농기계를 다루다가 다쳤다고 한다.

그가 했던 축사 일이 얼마나 고되고 험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지금은 그나마 다행이다.

1년 전까지는 젖소에서 우유를 짜는 김씨를 도와야 했다.

착유 작업이 아침 5시 30분 시작되다보니 그 이전에 일어나 소를 깨끗하게 닦아줘야 하고 우유를 많이 낼 수 있도록 배불리 먹여야 한다.

이 일은 모두 고스란히 고씨 몫이었다.

우유 소비가 줄자 김씨가 1년 전 착유 작업을 중단하면서 그나마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고단함은 덜게 됐다.

고씨가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일은 축사 청소다.

1주일에 한, 두 번씩 해야 하는데 분변을 걷어내는 일 자체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된 데다 악취까지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장화를 신고 축사로 들어갈 때마다 고씨의 얼굴은 절로 구겨지곤 했다.

농장주 김씨가 트랙터를 타고 축사를 청소하지만 가장자리와 군데군데 남은 분뇨를 치우는 것은 순전히 고씨의 몫이었다.

한 축산업자는 "지적 장애인이라 우유를 짜거나 트랙터를 모는 전문적인 일은 못하고, 허드렛일을 했을 것"이라며 "오히려 몸으로 때워야 하는 일이어서 온종일 중노동에 시달렸을 것"이라고 혀를 찼다.

냄새도 역겨웠다.

축사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쪽방에서 십여년을 살아왔지만 축사의 악취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때로는 축사 청소를 하라는 김씨의 말을 듣지 않고 버텼다.

그럴 때는 으레 혼나기 일쑤였다.

매질에 밥을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했다.

농장주 김씨는 "감금하고 폭행한 적은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이웃 주민들의 말은 다르다.

축사 인근 마을 주민은 "그 사람(만득이)이 밥도 못 먹고 밖에 나와 있길래 농장주한테 가서 '이 사람아 일을 부려 먹으면서 밥도 안 주고 일 시켰냐'고 혼낸 적이 있다"고 말했다.

다른 주민도 "만득이가 제때 밥을 얻어먹지 못하는 것 같았다"거나 "일을 못 하면 (농장주가) 굶겼다"고 전했다.

끼니를 얻어먹지 못하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폭행도 당한 것으로 보인다.

고씨는 "주인에게 맞았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고씨는 경찰에서 "소똥 치우는 것이 싫다.

농장에 다시는 돌아가기 싫다"고 19년간 이어진 강제노역 생활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몸 곳곳에 상처도 있었다.

고씨의 귀향을 반긴 고향 마을 주민은 "얼마나 혹독하게 일하고 대접받았는지 짐작이 간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전까지 자신의 의사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지적 장애인 고씨는 김씨의 가혹행위에 항변도, 대항도 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축사를 벗어나 달아났다.

배가 고프면 제발로 돌아가는 '소심한 반항'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고씨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을 주민들도 고씨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지만, 마을의 분란을 일으키며 그를 구조하려고 선뜻 나서지는 않았다.

그렇게 19년의 세월동안 고씨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임금 한 푼 받지 못하는 고된 일과 가혹행위를 감내하는 '축사 노예'로 지내야 했다.

폭염 끝에 최고 100㎜의 폭우가 충북에 쏟아지면서 축사 악취가 진동했던 지난 1일 그는 축사 청소를 하라는 김씨의 말을 듣지 않고 혼날 것이 두려워 '탈출'을 감행했다.

간혹 있었던 사소한 반항이 될 수도 있었던 그의 이번 탈출은 우여곡절 끝에 경찰과 조우하면서 지긋지긋한 축사노예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청주연합뉴스) 심규석 기자 k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