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 저가수주→저가 하청업체 선정→무리한 공기단축→안전사고 유발
협력업체 근로자, 업계 불황 땐 실직 1순위…비극적 선택도


최근 열악한 업무 환경과 위험한 작업 현장으로 내몰리는 하청업체 근로자의 비극적인 희생이 잇따르고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을 관계(원청-하청)와 불공정 관행, 불황·실직은 상대적 약자인 하청 근로자를 막다른 길로 내몰고 있다.

이들의 안타까운 희생을 막기 위해 원청과 하청업체간 상생 노력과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 위험작업 도맡는 하청근로자…실직 협력업체 근로자들 막다른 선택
14일 울산시 석유화학공단 효성 용연1공장 창고 증설공사 현장에서 근로자 박모(48)씨가 30m 아래로 추락해 그 자리에서 숨졌다.

박씨는 하청업체 소속으로 지상 30m 높이에서 볼트를 결합하는 작업 중이었다.

지난 8일 전남 영광과 무안을 잇는 칠산대교가 공사 중 기울어지면서 무너지는 사고가 났고, 근로자 6명이 기울어지는 다리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버티다가 다쳤다.

다친 근로자 가운데 4명은 하청(협력)업체가 고용한 외국인 근로자였다.

지난달 28일에는 울산시 고려아연 2공장에서 황산이 유출돼 하청업체 근로자 2명이 숨지고 4명이 다쳤다.

같은 달 1일 경기도 남양주 지하철 공사장에서는 폭발 붕괴 사고가 발생, 하청업체가 고용한 근로자 4명이 숨지고 10명이 다쳤다.

지난 5월에는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하청업체에 고용된 스크린도어 정비업체 직원 김모(19)씨가 승강장으로 진입하던 열차와 스크린도어 사이에 끼여 숨지기도 했다.

조선업 불황으로 하청 근로자를 중심으로 대규모 실직이 이어지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11일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에서 협력업체 근로자 김모(42)씨가 스스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김씨는 조선업 경기침체로 다니던 회사를 나온 뒤 다른 일자리를 찾다가 결국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4∼6월 구조조정 여파 속에서 삼성중공업 협력업체 직원 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해 12월 울산 현대중공업 협력업체 대표가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기도 했다.

◇ 대기업 공사 현장에서 일은 하청 근로자만
원청업체가 공정의 일부 또는 상당수를 하청업체에 맡기는 것은 국내 산업현장의 일반적인 시스템으로 굳어졌다.

비핵심 공정까지 모든 업무를 원청업체가 수행하는 것보다는 전문성을 가진 하청업체에 맡기는 편이 효율적이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논리에서다.

저가입찰로 공사를 따낸 원청업체들은 비용을 줄여 수익을 내기 위해 역시 최저가 입찰로 하청업체를 선정하는 경우가 많고 하청업체는 낮은 비용으로 조금이나마 수익을 내려고 무리하게 공기를 단축하고 인력을 줄이면서 산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구조 안에서 원청업체 직원들은 핵심업무인 설계·시공·관리를 맡고 하청 근로자들은 현장에 직접 투입돼 위험한 업무를 대부분 맡는다.

유해한 작업환경에서 누군가는 일을 해야 하고 상대적으로 노동조합 등이 있어 보호받는 원청업체 직원에 비해 그렇지 못한 하청 근로자를 투입하기 수월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더 값싼 임금을 받고 신분마저 불안한 하청 근로자 대부분은 유해 환경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크고, 노출된 정도만큼 재해를 입을 가능성도 커진다.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현장의 하청 근로자에게 그 책임이 떠넘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산재 사망자 중 하청 근로자 비율은 2012년 37.7%, 2013년 38.4%, 2014년 38.6%로 높아지더니 지난해에는 40%를 넘어섰다.

◇ "하청 근로자 안전사고 막아라" 정부, 원청업체 사고 책임 제도화
고용노동부는 지난달 하청업체의 안전사고에 대해 원청업체에 책임을 묻고 안전조치 위반 때 원청업체 제재를 대폭 강화하는 내용의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개정안에서는 원청업체가 하청업체 근로자의 사고 예방을 위해 안전·보건 조치를 해야할 장소를 '추락 위험 등 20곳'에서 '근로자가 작업하는 모든 장소'로 전면 확대했다.

하청업체 안전사고에 원청업체의 책임이 있는 경우 '1년 이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 벌금'에서 '5년 이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 벌금'으로 벌칙을 대폭 상향했다.

사망사고가 발생하면 '7년 이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원청 대기업과 하청 중소기업간의 상생을 위한 노력도 추진 중이다.

중소기업중앙회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하청업체의 상생과 동반성장 필요성을 환기시킬 수 있도록 입법 청원 활동을 펼치기로 했으며 동반성장위원회도 하청 근로자의 업무환경과 복지수준 개선 대책을 마련 중이다.

◇ 양극화ㆍ차별이 비극의 원인…안전비용, 인력 늘려야
노동계와 전문가는 양극화,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차별의 문제가 하청업체 근로자의 비극을 낳는 원인으로 보고 있다.

근로자의 처지가 불안하고 악순환을 끊기 힘든 사회 구조에서 이런 비극은 재생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원청에서 이윤을 높이기 위해 안전 관리 비용을 줄이고 그 위험을 하청 근로자가 떠안게 되는 구조"라며 "안전 관리 비용과 인력을 늘리고 산재 책임과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동 전문 김정희 변호사는 "파견 근로, 사내 하청 등 근로자가 처한 약한 고리, 불안한 지위를 개선해야 한다"며 "노동을 비용이 아닌 투자로 인식하고, 근로자의 삶을 개선하고 사회를 튼튼하게 하는데 투자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한건설협회 광주지부 관계자는 "건설현장 일이 대부분 직접 고용이 아닌 다단계 하도급 구조로, 장시간 힘든 작업 환경을 견딜 수 있는 하청 근로자를 투입하지 않고 최저가 낙찰제에 따른 공사 금액을 맞추기 어려운게 현실이다"며 "애초부터 이윤이 남기 힘든 구조여서 하청업체가 안전 관리자 배치, 교육, 시설 구비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

원청업체의 관리·감독 책임을 철저히 묻고 하청업체도 안전 관리와 기술개발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제안했다.

(전국종합연합뉴스) 장덕종 기자 cbebop@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