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경정신약물학회 "약물치료 발전해도 치료환경은 제자리걸음"

지난 5월 서울 강남역 인근의 한 주점 건물 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흉기로 찔러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조현병 환자의 '묻지마 범죄'로 밝혀졌다.

8년 전부터 조현병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피의자가 지난 3월부터는 의사와 상의도 않은 채 약을 먹지 않아 여성에 대한 피해망상 증상이 생겼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또 같은 달 서울 수락산 등산로에서는 60대 남성이 같은 또래의 여성을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사건도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이 피의자는 범행 직전에 조현병 약을 처방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조현병과 연관된 범죄가 잇따르자 경찰은 정실질환자 범죄의 예방적 차원에서 과거 중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거나, 앞으로 저지를 우려가 큰 환자를 대상으로 입원치료를 적극 추진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조현병 등의 정신질환자는 강제적 성격의 '관리보다 '보호'와 '자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이런 가운데 지난 3일부터 5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고 있는 '제30회 국제신경정신약물학회(CINP) 학술대회'에서는 최근 사회문제가 됐던 이들 사건처럼 도움이 필요한 정신질환자를 방치하고 있는 치료환경의 문제점이 논의됐다.

이헌정 학술대회 조직위원(고대안암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은 "대부분의 정신과 약물은 불안, 환각, 우울 등이 폭력 또는 자살로 이어지기 전 증상을 완화한다"며 "문제는 치료를 꺼리거나 거부하는 환자들은 증상악화가 불을 보듯 뻔해도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점"이라고 5일 밝혔다.

실제 신경정신약물은 지난 수십년간 부작용을 현격히 줄인 2세대약물부터 효과가 오랜 시간 지속되는 장기지속형주사까지 눈에 띄게 발전했다.

그러나 치료환경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 위원은 "국가마다 상황은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나라는 의료진의 진단 등을 토대로 법원이나 경찰과 같은 공권력이 정신질환자의 입원과 외래진료에 관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실 자각과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정신질환자의 경우 국가 차원에서 입원이든, 외래든 치료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조현병에서 비롯된 범죄가 발생하기 전의 선제적인 예방조치로 볼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정신질환자의 치료 책임을 의료진과 보호자에게 모두 전가하고 있는 실정이란 게 이 위원의 주장이다.

그는 "의료진이 환자에게 외래치료를 명령하는 제도가 존재하지만 유명무실한 상태고 강제입원 역시 정신보건법 개정으로 집행이 더 까다로워졌다"며 "환자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환자들의 치료를 보장해주는 사회 안전망은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조현병 환자의 살인사건이 사회문제로 부각되면서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마저 악화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 위원은 "정신질환자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보다 위험한 것은 환자들이 사회낙인이 무서워 병을 숨기거나 정신과 진료를 받지 않으려는 행태"라며 "정신질환자의 범죄율이 일반인보다 낮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도 잘못된 인식이 치료를 방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신질환을 감기, 암, 골절 등과 같은 질병으로 보고 치료를 당연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위원은 "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주기적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거나 사건·사고에 휘말리면 직장이나 학교로부터 정신치료 명령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며 "미국, 유럽 등에서는 실생활이 반영된 현실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상상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신질환 치료는 혁신적인 신약이나 의학기술만으로는 불가능하다"며 "정신질환을 질병으로 인식하는 사회 분위기와 치료를 거부하는 환자에게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연합뉴스) 강애란 기자 aera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