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의 치매 치료제 복용 사실을 알면서도 "아버지가 나를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주장의 설득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반년 넘게 "아버지는 정상"이라는 거짓말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더구나 치매약 복용 사실이 외부로 드러나는 것을 피하려고 신격호 총괄회장이 직접 의료진의 진료를 받지 않은 채, 신동주 전 부회장 측이 비정상적인 방식을 통해 치매약을 구했다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오고 있어 연이은 거짓말로 인한 도덕성 논란뿐 아니라 의료법 위반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 치매약 복용 재개하고도 "정신건강 정상" 주장

롯데그룹 관계자들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16일 신동주 전 부회장이 설립한 SDJ코퍼레이션 인사들이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4층 신 총괄회장 집무실 관할권을 롯데그룹으로부터 넘겨받을 당시, 그룹 소속 비서실은 SDJ측에 신격호 회장이 복용하는 여러 약을 설명과 함께 넘겨줬다.

이 중에는 치매 증상 완화제 '아리셉트(Aricept)'도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SDJ측은 이 안내를 무시하고 신격호 총괄회장에게 아리셉트를 투약하지 않다가 이상 행동이 심해지자 두 달이 지난해 12월에서야 아리셉트를 다시 처방받아 신 총괄회장에게 제공했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이후 신 총괄회장은 매일 저녁 10㎎의 아리셉트를 투약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큰아들 신동주 전 부회장이 이전까지는 정말 신 총괄회장의 정신건강 문제를 알지 못했다고해도 지난해 10월, 늦더라도 같은 해 12월께는 아버지의 상태와 치매약 복용 사실을 분명히 인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SDJ측 관계자는 "작년 10월 신 총괄회장 집무실 인수인계 과정에서 아리셉트 복용 관련해서는 통보받은 적이 없다"면서도 "그래서 세 달 정도 아리셉트를 복용하지 않다가 12월에서야 복용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SDJ측의 진술만 믿더라도, 늦어도 작년 12월 이후로는 신동주 전 부회장측도 신 총괄회장의 문제를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신 전 부회장과 SDJ측은 신 총괄회장 집무실 관리권 인수 이후 지금까지 약 8개월동안 줄곧 "신격호 총괄회장의 정신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이미 지난해 7월 신동주·동빈 형제간 경영권 분쟁이 터졌을 때부터 롯데그룹 안팎에서는 "신 총괄회장이 3~4년전부터 치매 약을 먹고 있다"는 증언이 나왔지만, 신동주 전 부회장측은 이에 대해 "신동빈 회장이 경영권을 위해 아버지까지 치매로 몬다"며 비난했다.

심지어 지난해 12월 SDJ측은 신 총괄회장의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신격호 총괄회장이 프로바둑 기사 조치훈 9단과 직접 바둑을 뒀다"며 관련 사진을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다.

SDJ측은 올해 2월 3일 서울가정법원에서 열린 신격호 총괄회장 성년후견인(법정대리인) 지정 관련 첫 심리 직후 "신 총괄회장이 법정에서 '50대 때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다.

내가 왜 나의 판단력 때문에 여기까지 나와서 이런 일을 해야하느냐'고 말했다"고 자신있게 전하기까지 했다.

결국 정신건강 이상 가능성이나 치매약 복용 사실 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경영권 분쟁에서 유리한 국면을 점하고 성년후견인 지정을 막기 위해 신 총괄회장의 객관적 건강 상태를 숨겨온 셈이다.

더구나 지난해 12월 다시 아리셉트를 복용하기 시작한 즈음, 이 약을 어떻게 구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신동주 전 부회장의 '보필'을 받기 시작한 작년 10월 이후 12월 전까지 신격호 총괄회장의 병원 방문 이력은 11월 초 '전립선비대증에 따른 감염'으로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것이 거의 전부이기때문이다.

10월 19일 잠시 서울대병원에 들렀으나 혈압과 맥박을 잰 '문진'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때 처방이 이뤄졌을 가능성은 없다.

만약 신격호 총괄회장의 정신건강 상태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직접 진료를 받지 않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치매약을 구했다면, 의료법 17조를 명백히 어긴 행위로 처벌 대상이 된다.

◇ "예방 차원일 뿐, 치매 아니다" vs "치매 소견 받았다"
신 총괄회장의 치매약 복용 사실이 드러난 현 시점에서도, SDJ측은 "약을 복용하긴 했지만, 치매는 아니다"라는 애매모호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SDJ측 법률대리인은 "아리셉트가 치매 치료제이지만, 예방 차원에서도 쓰인다"며 "신격호 총괄회장은 지금까지 알츠하이머로 진단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성년후견인 신청자(여동생 신정숙씨)측 법률대리인은 "치매를 예방하는 약이란 게 확실히 있는지 의문"이라며 "심리를 앞두고 있어 구체적 내용을 공개하기는 어렵지만, 정상인에게 치매를 예방하라고 약을 줬다는 주장보다 전문 의료인의 치매 소견에 따라 아리셉트라는 증상 완화제가 처방된 것으로 보는 게 더 자연스럽다"고 반박했다.

그는 "더구나 이미 2010년부터 약을 처방받아 복용했다는데, 6~7년이 지난 지금은 환자의 상태가 얼마나 더 심해졌겠느냐"고 반문했다.

한 대학병원 정신과 전문의는 "아리셉트가 여러 치매 단계에 걸쳐 매우 폭넓게 사용되는 증상 완화제인만큼 아리셉트 복용만으로 초기 치매(인지장애) 정도인지, 중증 치매인지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며 "하지만 분명한 점은 치매 증상에 해당하는 행동이 확인됐기 때문에 의료진이 처방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아리셉트의 '치매 예방' 효과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히 검증된 것은 아니다"라며 "그래서 이 약을 환자의 요청에 따라 예방용으로 처방하는 경우는 보험 적용이 되지 않고 환자가 약값을 모두 부담해야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롯데그룹 내부에선 신격호 총괄회장이 이미 수 년전부터 초기 치매에 해당하는 이상 행동을 보였다는 증언과 목격담이 이미 넘쳐나고 있다.

복수의 롯데 관계자는 "4년전부터 신격호 총괄회장이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직후부터 치료약을 복용하는 것으로 안다.

신동주 전 부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등 직계 비속은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임원은 "1시간 보고하는 내내 총괄회장이 20~30번 같은 질문을 해서 20~30번 같은 대답을 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2009년께 신격호 총괄회장이 잠옷 차림으로 롯데호텔 1층 로비에 내려가서 딸 신영자 이사장이 병원에 모시고 갔다는 진술까지 나왔다.

하지만 롯데그룹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창업주 신격호 총괄회장의 병세를 언급하는데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신동빈 회장은 지난해 12월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에 대한 성년후견인 재판이 시작될 즈음 그룹 임직원들에게 아버지 신 총괄회장 건강상태에 대한 구체적 언급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그룹은 이번에도 신격호 총괄회장의 치매약 복용과 관련한 질문에 대해 답변을 회피했다.

(서울연합뉴스) 신호경 이유미 기자 shk999@yna.co.kr, gatsb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