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한경닷컴과 인터뷰하는 래리 톰슨 링링대 총장. / 변성현 기자
지난 14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한경닷컴과 인터뷰하는 래리 톰슨 링링대 총장. / 변성현 기자
<대담 변관열 한경닷컴 산업경제팀장>

[ 김봉구 기자 ] “창의성(creativity)은 만질 수 있어야(tangible) 합니다. 누구나 머릿속에 그려볼 수는 있죠. 그건 막연한 상상력이에요. 완전히 새로운 것이든 기존의 무엇인가를 바꾸는 것이든,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쳐 실제 결과물로 나와야 진짜 창의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14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만난 래리 톰슨 링링대 총장(사진)은 “학생들이 실수하거나 실패했을 때 ‘틀렸다’라고 하는 교육은 창의력을 기를 수 없다. 링링대 창의성 교육의 핵심은 위험 요인을 감수하고 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실패를 받아들이는 능력”이라고 강조했다.

링링대(Ringling College of Art & Design)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아트·디자인 명문이다. 방한 일정을 소화 중인 톰슨 총장을 한경닷컴이 단독 인터뷰했다.

톰슨 총장은 “앞으로 학생들은 대학 졸업 후 일생 동안 평균 8개의 커리어를 경험할 것이다. 그런데 그중 4개는 지금은 없지만 새로 생겨나는 커리어가 될 것”이라며 “현존하지 않는 4개의 미래 커리어에 잘 대처할 수 있도록 창의력을 길러주는 게 모든 교육기관의 도전 과제”라고 말했다.

지난 13일 KAIST에서 특강한 그는 전 산업에 걸쳐 디자이너와 엔지니어의 융합이 일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톰슨 총장은 “더 이상 테크놀로지만으로는 소비자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디자인이 결합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미국 정부도 디자인이 경제 패러다임을 바꾸는 핵심 요인으로 보고 이 분야를 열심히 밀고 있다”고 했다.

링링대는 아트·디자인과 테크놀로지와의 융합이 중요하다고 판단, 수십 년 전부터 이 분야에 앞장서 투자해왔다. US뉴스&월드리포트가 컴퓨터 인프라 수준을 평가한 ‘모스트 와이어드 캠퍼스(Most Wired Campus)’ 부문에서 미국 1위에 오르기도 했다.

◆ 링링대는?

플로리다주 새러소타에 위치한 85년 역사의 링링대는 모든 수입을 학생교육에 투자하는 비영리 사립대다. 최근 그래픽디자인USA 선정 ‘톱 디자인 스쿨’에 뽑혔고, 링크트인 주관 ‘디자이너를 위한 최고 대학(Best University for Designer)’ 전미 랭킹 7위에 올랐다.

2012년 아카데미상 단편애니메이션 수상작 ‘미스터 레스모어의 환상적인 책 여행’ 감독 브랜든 올덴버그가 이 대학 졸업생이다. 링링대 졸업생들은 디즈니, 픽사, 드림웍스 등 유명 스튜디오에 여럿 입사하고 있다. 인기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인사이드 아웃’ 제작진 상당수도 이 대학 출신이다.
톰슨 총장은 "막연한 상상력을 넘어 만질 수 있을 만큼 현실화돼야 진짜 창의력"이라고 강조했다. / 변성현 기자
톰슨 총장은 "막연한 상상력을 넘어 만질 수 있을 만큼 현실화돼야 진짜 창의력"이라고 강조했다. / 변성현 기자
- KAIST에서 강연했다고 들었습니다.

“인상 깊은 방문이었습니다. 학교 시스템이 아주 역동적이더군요. 왜 창의성이 새로운 경제의 연료(fuel)이자 미래 리더의 덕목이 되는지에 대해 강의했습니다. KAIST는 공학도가 주축인 학교라고 들었는데요. 앞으로 디자이너와 엔지니어는 함께 해야 합니다. 테크놀로지에 디자인이 더해져야 소비자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으니까요.”

- 모든 산업에서 디자인의 역할이 커지고 있어요.

“틀림없이(absolutely) 그렇게 될 겁니다. 제품, 서비스, 정보 등 모든 분야에서 디자인이 분리될 수 없는 요소입니다. 미국 행정부도 디자인을 미국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꿀 핵심 요소라고 보고 열심히 밀고 있어요.”

- 창의성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과연 창의성이란 뭔가요.

“중요한 질문이네요. 보통 창의력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구름 속에 있는 것, 만질 수 없는 막연한 것, 정의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니에요. 누구나 상상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창의력은 실제의 결과물로 도출돼야 완성되는 것입니다.”

-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죠.

“세상을 바꾸는 ‘진짜 창의력’은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쳐 만질 수 있는(tangible) 형태여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창의성은 완전히 새로운 것일 수도 있고, 기존에 있는 무언가를 바꾸거나 뒤집는 것일 수도 있어요. 다만 막연한 상상이나 공상을 넘어 현실화돼야 제대로 된 창의성이라 정의할 수 있는 것이죠.”

- 링링대는 창의적 인재를 기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아트·디자인 학교의 특성상 창의적 학생들이 비교적 많이 들어오는 편이에요. 미국도 학생들의 창의력을 죽이는(discourage) 교육시스템이 문제인데요. 저는 우리 학생들을 이런 교육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라고 부릅니다. 링링대는 이런 수업을 해요. 30초 만에 겨울에 대한 이미지를 그려보라고 합니다. 80~90%는 똑같은 게 나오죠. 눈사람, 크리스마스 트리 같은 것들이요. 우리는 학생들에게 ‘기존의 것을 똑같이 반복할 거라면 굳이 할 필요 없다’고 주문합니다.”

- 그렇다면 창의성 교육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건 위험 요인을 수용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실패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그래야 발전할 수 있어요. 일반적 교육시스템에선 쉽게 용납이 안 되죠. 학생이 실수하거나 실패하면 ‘틀렸다’고 하는데, 창의성 교육은 정반대가 돼야 해요. 모든 가능한 위험과 실패를 수집해 다른 방안을 되풀이해 보는 겁니다.

어떤 학생이 A란 생각을 교수에게 보내면 24시간 안에 교수들이 피드백을 해줘요. 틀렸다, 맞다가 아니라 ‘A는 B나 C가 될 수 있겠다’는 내용으로요. 한 가지 주제에 대한 여러 다른 답을 생각해보는 게 중요합니다. 사지선다형처럼 답을 선택(multiple choice)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답(multiple answer)을 만드는 교육이 필요한 거죠.”

톰슨 총장은 "미래의 새로운 커리어에 대응할 수 있는 창의성을 길러주는 게 교육기관의 과제"라고 말했다. / 변성현 기자
톰슨 총장은 "미래의 새로운 커리어에 대응할 수 있는 창의성을 길러주는 게 교육기관의 과제"라고 말했다. / 변성현 기자
-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답이 나오기도 하겠습니다.

“생각의 힘이 길러집니다. 학생들이 우리 교수들을 ‘24시간 교수’라고 부르는데요. 24시간 내내 연락해 물어본다는 뜻과 24시간 안에 피드백 한다는 두 가지 의미로요. 단 학생들이 서로 경쟁하게 하기보다 협동하는 과제를 내줍니다.”

- 미래사회에선 융합이 중요하죠.

“더 많은 협력(more collaboration)이 창의력의 원천입니다. 원래 하던 것, 알던 것만 해선 창의력이 나오지 않아요. ‘전혀 모르는 분야’의 ‘나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미래가 될 겁니다.”

- 테크놀로지와 디자인이 접목되면 어떻게, 얼마나 발전할 수 있을까요.

“정답을 안다면 저에게도 알려주세요. (웃음) 사실 그런 고민 때문에 미래학자를 초빙했습니다. 아트·디자인 대학이 미래학자를 고용한 건 아마 미국에서 유일할 텐데요. 앞으로는 학생들이 졸업 후 일생 동안 8개의 다른 커리어를 경험할 것이라 전망합니다. 그런데 그중 4개는 현존하지 않는, 즉 새롭게 생겨날 커리어일 거라고 해요. 이 4개의 커리어에 어떻게 대처할지가 교육기관의 가장 큰 과제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의 창의력을 길러주는 게 중요하죠.”

- IT(정보기술)와 디자인의 융합에 관심이 많습니다만.

“지금까지 제품 디자인이 주류를 이뤘는데 앞으로는 ‘서비스 디자인’이 아주 중요해질 겁니다. 가상현실(VR)의 가능성도 눈 여겨 보고 있는데요. 지금의 VR은 고글을 쓰고 주어진 환경을 수동적으로 체험하는 수준이잖아요. 앞으로는 달라질 겁니다. 개개인이 무언가를 창출하는 가상현실이 도래할 거예요. 예를 들어 건축디자인도 VR로 하면 가상공간에 실제로 건축을 해보는 거죠. 테크놀로지와 디자인의 궁극적 융합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대학 중퇴자 가운데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같은 인물이 눈에 띕니다. 혹시 이런 창의적 인재를 미국의 제도권 교육이 받아주지 못하는 건 아닌가요?

“맞습니다. 정말 큰 문제(huge problem)예요. 창의적 인재 배출을 가로막는 교육시스템의 맹점이 분명 있어요. 미국이든 한국이든 이제 교육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어야 합니다. 리더가 ‘팔로 미’를 외치는 시스템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요.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분야라 해도 다독이고 북돋아주는 게 리더의 역할입니다.”

- 학교의 역할이기도 하죠.

“학생들의 시행착오와 실패를 받아들이는 환경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만드는 게 학교교육 시스템이고, 리더는 다양한 새로운 것들을 포용해야 하죠. 잡스도 결국 대학교육이 받아 안지 못한 예외적 사례였으니까요.”

- 링링대는 아트·디자인 분야에 특화된 대학이잖아요. 한국 대학의 고민 중 하나가 특성화인데 제언해주신다면.

“미국과 한국의 대학 시스템은 다르겠지만, 우선 총장이 대학의 장단점을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마케팅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아요. 본질이 바뀌어야죠. 링링대는 우선 민첩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소수정예인데요. 한 수업 당 학생 15명 이상 안 받습니다. 덩치가 커지면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기 어렵고 학생교육도 아무래도 소홀해질 가능성이 크니까요.

독립성도 중요합니다. 링링대는 정부에서 어떤 지원도 받지 않는 비영리 사립대예요. 독립성은 대학 정체성(identity)을 만들어나가는 데 기본이 됩니다. 마지막은 미래 기획이죠. 아트·디자인 대학으로는 드물게 전임교원 비율이 70%를 넘어요. 보통은 강사 비율이 80% 정도 되거든요. 각각 장단점이 있지만 전임교원이 많아야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할 수 있습니다.”

◆ 톰슨 총장은…

학부에서 수학을 전공한 뒤 교육행정 석사, 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변호사로 활동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1999년 총장에 취임해 17년간 학교를 이끌고 있으며 플로리다주 대학협의체 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사진= 변성현 기자 byun8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