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시 의견서에 英·美 폐질환 전문가 대거 등장해 '본사 개입 의혹' 증폭
검사 11명 배치 총력전…신현우 前대표 등 4명 구속


올 1월 시작해 4개월간 숨 가쁘게 진행된 가습기 살균제 피해에 대한 검찰 수사가 반환점을 돌았다.

검찰은 이르면 7월 말까지 수사를 끝내겠다는 목표로 속도를 내고 있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검찰은 그동안 피해자 전수조사 등을 통해 살균제와 폐손상 사망 간의 인과관계를 확인했고, 가해업체의 과실 책임도 상당 부분 규명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향후 수사의 핵심은 가장 많은 피해자를 낸 옥시레킷벤키저(옥시)의 영국 본사가 제품 유해성 검사 생략과 증거은폐 등 각종 의혹에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는지 밝혀내는 일이 될 전망이다.

하지만 옥시 영국 본사가 개입했다는 구체적인 단서가 확보될 경우 수사 기간이 더 늘어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 사태 발생 5년 만의 검찰 수사…'속전속결' 행보
서울중앙지검은 가습기 살균제 사망 관련 수사를 최우선 해결과제로 꼽고 올 1월 특별수사팀(팀장 이철희 형사2부장)을 꾸려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

검사 11명이 투입됐다.

각종 고발 사건을 수사한 경찰이 작년 9월 제품 제조·판매업체 8곳을 기소 의견으로 송치한 지 4개월 만이다.

검찰은 우선 살균제가 실제 폐 손상을 초래했는지 확인하고자 질병관리본부(질본)의 역학조사 결과와 국내외 관련 논문 등 방대한 자료를 검토했다.

옥시 등을 압수수색해 한국건설생활환경시험연구원(KCL)·서울대·호서대 등 업체가 별도로 발주한 유해성 연구 자료도 확보했다.

200명에 가까운 피해자 전수조사도 병행했다.

검찰은 이를 통해 실제 폐 손상 사망 사고를 낸 가해업체를 옥시(제품명: 옥시싹싹 뉴가습기당번), 롯데마트(와이즐렉 가습기 살균제), 홈플러스(홈플러스 가습기 세정제), 버터플라이이펙트(세퓨) 등 4개사로 압축했다.

검찰은 이들 업체가 제품 출시 전 반드시 거쳐야 할 안전성 검사를 생략하는 등 과실이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업체 관계자 소환조사는 옥시를 시작으로 지난달 19일부터 시작됐다.

안전성 검사의 필요성을 알고도 이를 무시하고 판매를 강행했는지가 핵심이었다.

검찰은 옥시가 제품을 제조·시판하기 전 인체 유해 가능성을 사전에 인지했다는 다수의 증거를 확보해 당시 최고경영자였던 신현우(68)씨와 연구소장·선임연구원 등 3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및 과실치상 등 혐의로 구속했다.

가습기 살균제를 폐 손상 원인으로 지목한 질본 역학조사 결과를 반박하고자 옥시가 서울대 수의대 조모(56) 교수팀에 의뢰한 독성실험 보고서가 사측에 유리하게 조작된 흔적도 포착했다.

돈을 받고 보고서를 써 준 혐의로 조 교수도 구속됐다.

세퓨를 출시한 오모 전 대표 역시 유해 제품을 제조·판매해 다수의 피해자를 낸 혐의가 인정돼 구속됐다.

그는 인터넷 등에서 떠도는 정보로 콩나물 공장에서 제품을 만든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됐다.

세퓨는 독성물질을 인체 무해 수준보다 160배 이상 함유한 것으로 드러났다.

마지막 남은 롯데마트와 홈플러스도 조만간 처벌 수위 및 범위 등이 결정될 전망이다.

피해 정도·규모 등에 비춰 이들 업체도 혐의를 벗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 옥시 외국인 임원 줄소환…영국 본사 겨냥
검찰은 지난주 옥시의 전·현직 외국인 임원들에 대한 소환조사에 착수했다.

신 전 대표가 최고경영자에서 물러난 후인 2005년부터 제품 판매가 중단된 2011년까지의 책임 소재와 증거은폐 책임자를 가리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재무담당 이사인 울리히 호스터바흐(49·독일)씨가 이달 19일 참고인으로 출석해 조사를 받은 데 이어 23일에는 존 리(48·미국) 전 대표가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된다.

존 리 전 대표는 2005∼2010년 5년간 최고경영자를 지냈다.

이 시기는 제품 판매량이 가장 많았던 때다.

검찰은 존 리 전 대표가 가슴 통증·호흡곤란 등 제품 부작용을 호소하는 민원을 접수하고도 이를 무시하고 판매를 강행한 단서를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2010∼2012년 옥시 경영을 책임진 거라브 제인(47·인도) 전 대표 역시 수사선상에 올라 있다.

증거은폐 의혹의 핵심 인물인 그는 현재 싱가포르 지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검찰은 그의 변호인과 소환일정을 조율 중이다.

당사자가 응하면 이번 달 내로도 조사가 가능하다.

거부할 경우 당사국에 범죄인 인도를 요청하는 단계까지 가야 해 조사가 많이 미뤄질 수 있다.

검찰 관계자는 "범죄인 인도까지 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당사자를 설득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이외에 10명 안팎의 외국인 전·현직 임원을 소환 대상에 올려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주변에선 결국 영국 본사를 둘러싼 의혹 규명까지 나아갈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이들이 주요 의사결정 사항을 놓고 직·간접적으로 본사와 소통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본사가 이번 사태에 깊이 개입한 정황은 곳곳에서 드러났다.

옥시가 김앤장을 통해 검찰에 제출한 의견서 중에는 국내외 전문가들이 작성한 '공동전문가 보고서'라는 게 있다.

질본의 역학조사 과정과 결과가 과학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보고서 작성에는 영국 간질성 폐 질환 전문의인 T 박사 주도로 영국 폐병리학자 A 박사, 폐영상 전문가 D 교수, 미국 폐병리학자 T 박사, 싱가포르 폐 질환 전문의 P 박사, 국내 유명 병원의 김모 교수 등이 참여했다.

영국·미국·싱가포르·한국 등의 다국적 폐 질환 전문가가 참여한 반박 보고서를 만든 작업을 한국법인 홀로 기획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본사 임원들이 대부분 화학 분야 전문가로 채워진 점도 '본사 개입설'에 무게를 실어준다는 점에서 향후 검찰 수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관심이 모아진다.

(서울연합뉴스) 전성훈 기자 luch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