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실제 주인(명의신탁자)의 부탁을 받고 장부상 소유자로 등기한 사람(명의수탁자)이 부동산을 마음대로 처분해도 횡령죄가 될 수 없다고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판결했다.

대법원이 기존 방침을 바꾼 것으로 종전 판례는 모두 폐기된다. 그동안 대법원은 부동산을 산 실제 소유자가 부동산실명법을 어기고 다른 사람 이름을 빌려 등기하는 ‘중간생략등기형 명의신탁’에서 명의수탁자의 임의처분 행위는 횡령죄가 된다고 봤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9일 공동소유 토지에 저당권 등기를 설정해준 혐의(횡령)로 기소된 안모씨(58)의 상고심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대전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중간생략등기형 명의신탁은 불법이며 이에 따른 소유권이전등기는 무효이기 때문에 신탁부동산의 소유권은 매도인이 그대로 갖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어 “수탁자는 횡령죄의 주체인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로 볼 수 없어 횡령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명의수탁자를 형사처벌하는 것은 부동산실명법이 금지·처벌하는 명의신탁관계를 오히려 유지·조장해 입법 목적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타당하지 않다”고 판결 배경을 설명했다.

대법원은 “중간생략등기형 명의신탁과 매도인이 전후 사정을 아는 계약명의신탁이 비슷한데도 계약명의신탁에는 아무런 형사 처벌을 하지 않고 중간생략등기형 명의신탁에서만 횡령죄로 처벌하는 것은 법적 안정성을 해치고 일반 국민의 법 감정에도 맞지 않다”고 덧붙였다.

안씨는 2004년 A씨 등 세 명과 함께 충남 서산시 일대 논 9292㎡의 절반을 4억9000만원에 샀다. 비용은 안씨가 1억9000만원을, 나머지 세 명이 3억원을 부담했다. 논의 소유권은 편의상 안씨 명의로 돌려놓았다. 안씨는 2007년 B씨에게 6000만원을 빌리면서 이 논에 B씨의 근저당권을 설정해줬다. 이듬해에도 농협에서 5000만원을 대출받고 논에 근저당권 설정을 했다.

검찰은 안씨가 A씨 등이 가진 지분 약 61%를 횡령했다고 보고 기소했다. 1·2심은 “안씨만이 부동산의 단독매수인이라고 볼 수 없다”며 “수탁자인 안씨는 A씨 등을 위해 보관하는 자여서 횡령죄 주체가 된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최광석 부동산 전문 변호사는 “대법원이 명의신탁 근절 메시지를 준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인선 기자 ind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