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시 사태’를 계기로 국내 대형 로펌들 사이에 ‘사건 수임 딜레마’가 커지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 최대 가해 업체인 옥시레킷벤키저(현 RB코리아) 측 변호를 맡은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여론의 뭇매를 맞으면서다. 사회적 이슈가 된 사건을 어떤 로펌이 맡았는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면서 대형 로펌들은 ‘여론’과 ‘고객’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이다.
옥시 사태로 본 대형로펌의 사회적 관심사건 '수임 딜레마'…변론 맡자니 '여론 싸늘'
19일 법조계에 따르면 옥시는 당초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 변호를 김앤장이 아닌 다른 대형 로펌에 먼저 제안한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로펌은 소속 변호사들 간 난상토론을 거친 끝에 옥시 측 변호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로펌 관계자는 “옥시 측이 우리 쪽에 변론을 제의한 것은 사실”이라며 “다른 이유를 대긴 했지만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 사건을 맡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당시 이 로펌 내부에서는 “연쇄살인마도 변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변호도 제대로 못 받는 국가에서 어떤 기업이 신뢰를 갖고 사업을 하겠느냐”는 의견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대한변호사협회의 변호사윤리장전 19조에는 ‘변호사는 의뢰인이나 사건의 내용이 사회 일반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수임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고 돼 있다. 변호사윤리장전은 어길 경우 대한변협으로부터 공식 징계를 받을 수 있는 구속력 있는 규정이다.

로펌들이 국민적 관심을 받는 사건에 대해 ‘수임 리스크’를 고민했던 게 이번 옥시 사건뿐만은 아니다. 독도의 ‘다케시마’ 표기와 관련해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일본 측에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고 보도해 물의를 일으킨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대한 변호가 대표적이다. 법무법인 세종이 국내 여론을 고려해 변호를 거절한 이 사건은 태평양이 변론을 맡았다. 반면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건 5조원 규모의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에서는 태평양이 한국 정부를, 세종이 론스타를 각각 대리했다.

아부다비 국영석유투자회사와 네덜란드 자회사 하노칼이 한국 정부에 제기한 ISD에서는 김앤장이 한국 정부를 대리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고(故) 유병언 씨의 변호는 모든 대형 로펌이 맡기를 거절해 중소형 로펌으로 넘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한 변호사는 “대형 로펌 활동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론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로펌들은 여론을 지나치게 의식해 사건 수임을 거절하면 기업 등 주요 고객으로부터 신뢰를 잃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대기업 법무팀 소속의 한 변호사는 “외국 로펌들은 소송이 붙었을 때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며 “한국 로펌 가운데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는 곳이 김앤장”이라고 평가했다.

한 대형 로펌의 파트너변호사는 “로펌의 본질적 역할은 변론인데 사건을 가려 맡다 보면 이 같은 본질이 훼손된다”며 “불법적인 변론은 없어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사건 수임만을 이유로 로펌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