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 별세, '64년 신문 외길'…언론계 거목 떠나다
8일 별세한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사진)은 지난 64년여간 신문 외길을 걸으며 한국 언론계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1970년 조선일보 사장에 임명된 이후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위원회 이사, 중앙문화학원(중앙대) 이사장, 한·독협회 회장 등을 지냈고, 1993년에는 조카 방상훈 씨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주고 조선일보 대표이사 회장이 됐다. 이후 2010년부터 현재까지 조선일보 상임고문을, 지난해부터 연세대재단 명예이사장을 맡아왔다.

1928년 1월22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소학교 교사 방재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가계는 신문사업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고인의 작은할아버지인 계초 방응모가 금광사업으로 큰 부를 일군 뒤 1932년 경영에 어려움을 겪던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신문사업이 가업이 됐다.
8일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의 빈소를 찾은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왼쪽)이 헌화하고 있다. 조선일보 제공
8일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의 빈소를 찾은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왼쪽)이 헌화하고 있다. 조선일보 제공
경신고와 연희전문대 상과를 졸업한 뒤 1952년 조선일보 공무국에 견습사원으로 입사하며 신문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는 6·25전쟁 발발 직후 방응모 사장이 납북되고 조선일보 사옥은 불에 타 폐허가 된 상태로, 고인은 형인 방일영 사장과 함께 회사 재건에 주력했다. 편집국 교열부와 사회부, 경제부에서 기자로 8년간 활동하다가 조선일보 계열사였던 아카데미극장을 2년간 경영했다. 기자 시절 남다른 기획력을 보였다는 것이 조선일보 측 설명이다. 그는 1962년 상무로 조선일보에 복귀했고 1964년 대표이사에 취임했으며 1970년엔 사장에 올라 조선일보의 성장을 이끌었다.

사장을 맡은 뒤 ‘월간조선’ ‘월간 산’ ‘월간낚시’ ‘스포츠조선’ 등을 잇달아 창간하거나 인수했다. 1992년에는 국내 신문사 최초로 전국 동시 인쇄망을 구축하고, 신문제작 전산시스템(CTS) 개발을 완료하기도 했다. 1993년 조카 방상훈 현 대표이사 사장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준 데 이어 2003년에는 회장직마저 내놓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날 때까지 조선일보를 국내 최대 신문으로 성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06년 9월에는 방응모 선생 22주기 추모 행사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조선일보의 정치적 성향에 불만을 품은 사람으로 추정되는 괴한 두 명에게 차량 뒷유리창이 벽돌로 내려 찍히는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저서로는《조선일보와 45년》《나는 아침이 두려웠다》, 미수(米壽) 문집 《신문인 방우영》 등이 있다. 고인은 자서전인《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에서 “밤새 전쟁 치르듯 만든 신문이 독자들에게 전해지는 매일 아침 언제나 가슴이 떨렸다”고 회고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선영 씨, 아들 성훈씨(스포츠조선 대표이사 발행인), 딸 혜성·윤미·혜신씨, 사위 서영배(태평양개발 회장)·정연욱(경남에너지 대표이사 부회장)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2일 오전 8시. 장지는 경기 의정부시 가능동 선영이다. (02)2227-7500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